고성에서 보낸 시간의 단편
화진포로 향하는 길입니다. 고성은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보여 줘요. 특히 간성에서 화진포로 향하는 길, 주위를 둘러싼 산자락은 두 손을 모아 입을 막게 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그 광경을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보고 있으면 아름다움에 취해요. 옛 선인들이 첩첩산중이라는 말할 때, 이런 모습을 보고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화진포는 생태 습지를 품은 호수입니다. 바다와 맞닿아 있어서 자연의 동식물이 자라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에요. 그 경치를 내려다보는 작은 절이 하나 있고, 그 절에 차를 대고 난 뒤, 산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면 응봉이 나옵니다. 응봉은 드넓은 동해 바다를 우편으로 두고, 아름다운 화진포를 좌편에 두고, 정면 눈앞으로는 일만이천봉의 금강산을 볼 수 있는 곳이에요. 그곳에 서 있으면 측량할 수 없는 광활한 대자연 앞에서 먼지 같은 사람의 존재를 느끼곤 합니다. 와, 우리는 정말 작은 존재이네요,라는 말을 한 사람이 꺼내기 시작하죠.
눈을 감고 노을 지는 저녁의 응봉을 상상해 봅니다. 푸르고 적막한 깊은 동해바다, 주황빛으로 물드는 석양의 금강산자락. 마음은 따듯해지고 자연스럽게 호흡이 시작됩니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 바다내음과 향긋한 솔향기를 함께 맡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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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에서 다시 교암으로 향하는 길, 30분 남짓을 달려왔습니다. 내일 오전에 새벽 요가 수련이 준비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저녁까지 먹고 술 한 잔을 걸치고 귀가하면 체력이 남지 않을 것 같아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인사하고 집에 와서 짜장밥을 해 먹습니다. 어렸을 때, 마트에서 세일하면 990원에 한 개를 살 수 있었던 3분 짜장을 편의점에서 하나 들고 올라와 햇반에 데워 먹었어요. 영양은 부족할지 몰라도 맛은 좋아서 냠냠 신나게 저녁밥을 챙겨 먹습니다. 이후로도 가끔씩 레트로트 식품을 곧잘 사 먹곤 했어요. 몸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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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요가는 시간을 잘 지키는 수련원이었습니다. 눈을 뜨니 6시. 6시 10분까지 도착하라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눈도 뜨지 못한 채로 허겁지겁 요가복을 챙겨 입고, 겉옷을 걸친 뒤 내달리기 시작했어요. 달리고 또 달리고 턱끝까지 숨이 차오르는 걸 느끼며, 잠에서 깨지도 못한 정신을 붙들고 영랑호를 달렸습니다. 절반쯤 달렸을까요. 메시지 하나가 띵동 도착합니다. '오고 계신가요? 아직 출발하지 않으셨다면 오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잠깐 길 위에 멈춰 서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수련에 참여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근방을 한 번 둘러보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숨 가쁘게 달리던 발걸음을 늦추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어요.
영랑호는 속초에 있는 호수예요. 신라시대 화랑들이 수련했다는 이곳은 울산바위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제가 자주 들려 쉬어 갔습니다. 느린 걸음으로 걷다 보니 요가원 앞에 도착했습니다. 차창 너머로 사람들이 몸을 길게 늘이고 호흡하며 아사나를 수련하는 모습이 보여요. 모두들 평안한 시간이 되시길 바란다고 마음으로 인사하고, 저는 그 앞 벤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홀로 호흡을 가다듬습니다. 숨을 들이마쉬고 다시 내뱉으며 마음부터 발끝까지 감각을 깨워 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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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이라고 해도 될까요.
회사에서 늘 00님이라고 부르다 보니, 팀장님 대표님 이사님 이런 호칭을 쓰는 게 어색해요. 글을 쓰려고 하니 이름이 거론되는데, 이름을 거론할 수는 없고 고민하다가 선배님이라고 불러 봅니다.
선배님은 제가 고성에 내려간 직후, 일주일 동안 제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고 떠나셨습니다. 서둘러 서울에 돌아가고 싶으셨던 걸까요. 매일매일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시간 이외에는 어떻게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하는지 배우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렇게 태어나 처음으로 커피를 브루잉하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제는 몸에 조금 익은 브루잉 커피를 내리는 방법이에요. 2인 기준 커피를 내리는 방법입니다.
1. 전기포트의 온도를 94도로 맞춰요.
2. 원두 24g을 저울에 달아보고, 분쇄기에 갈아요.
3. 드리퍼 위에 종이 필터를 고이 접어 올리고, 뜨거운 물을 적셔요.
4. 아래에 떨어진 물을 빈 컵에 덜어 내고, 저울을 0점으로 다시 맞춘 후, 필터 위로 분쇄한 원두를 올려요.
5. 20초 동안 뜸을 들이듯 커피 원두 위에 뜨거운 물을 돌려가며 부어주고, 잠시 기다렸다가 1분 20초가 될 때까지 차분히 물을 흘려보내요.
7. 드리퍼 눈금에 2잔 표시까지 물이 내려오면 향을 한 번 맡고 손님에게 내어 드려요.
8. 혹시 커피 맛이 진하시면, 뜨거운 물을 조금 타드릴게요,라고 말하면서요.
커피를 내릴 때는 원두의 모양을 자세히 살펴요. 원두가 부풀었다가 내려가는 타이밍, 공기를 위로 퐁퐁 빼내기 위해 운동하는 모습을 살펴보다가 이때쯤이구나 감이 오면 그때부터 물을 서서히 부어서 커피를 내립니다. 한 달에 1kg의 원두를 브루잉하곤 했는데, 그날의 온습도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지는 게 신기했어요. 가끔 미각이 좋은 멤버 분이 오시면, 원두 맛의 레이어를 다 읽어내곤 하셔서 더 놀랐습니다. 커피를 내어드리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이 더 섬세한 경우였지요. 커피는 처음 만난 이들이 대화를 나누기에 참 좋은 도구였어요. 점심식사를 하고 나면 자연스레 커피가 당기고, 커피 머신이 아니라 직접 내려드리는 브루잉 커피를 거절하는 사람은 드물었어요.
저는 커피를 내리며 지나가는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어느 회사의 조직문화와 근무 제도, 고성을 찾아오게 된 이야기, 시시콜콜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작고 사소한 질문을 주고받으며 처음 보는 사이라서 나눠도 어색하지 않을 만한 이야깃거리를 풀어 나갔습니다. 그분들은 모르셨을 거예요. 제가 얼마나 그분들의 이야기가 반갑고 즐거운 지. 아 그렇군요, 오 재밌는걸요, 와 그건 처음 들어봤어요 라며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고 나면 커피 두 잔을 금세 다 마시곤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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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의 고성은 가끔 비가 내렸어요. 처음 만난 팀원들과 저녁 회식을 하러 가는 길, 숙소 출입구 근처에서 새소리가 들렸어요. 새들이 비를 피해 우리 건물에 자리를 잡은 거예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모두가 와, 하며 사진을 남겼어요. 작고 소중한 존재들에게 피할 곳이 될 수 있다니 무척 감사했어요. 새들이 비를 피해 가는 곳, 나의 일터는 꽤나 좋은 곳이라고 느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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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들어와서 저녁 회식에 참석해 본 적이 손에 꼽아요. 지난 2년 간 오후 근무를 하느라 밤 11시에 퇴근 했고, 술만 마시면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가십들에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새로운 팀에 합류하고 참석한 첫 회식은 남달랐어요. 회식 자리라서 일 얘기를 많이 하긴 했지만, 잘해보자는 이야기, 우리 팀에 잘 왔다는 이야기를 해주셨고. 잘해 봅시다, 잘하세요!라고 말하며 팀장님이 악수를 건네 주셨죠.
고성 여섯째 날 쓴 일기
저 이렇게 멋진 분들과 일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해요. 가끔씩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막막함이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랑하게 해내가자며 스스로를 다독여요. '잘'에 포커스를 맞추니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혼자 모니터 앞에 멍하니 앉아 있기 보다 사람들과 대화하며 방향성을 잡아가 보려 해요. 나부터 즐겁게 일하면 이 공간이 가진 힘과 고성이 가진 회복력이 자연스레 멤버들을 위로해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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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에피소드
회식 자리는 영금정 앞에 있는 선창활어횟집이었어요. 회식 자리 내내 어색했는데 하필이면 테이블에 나온 활어회가 너무 맛있어서 마음 속으로 기쁨이 주체되지 않았어요. 저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미간을 찌푸리거나, 흥이 돋아서 어깨춤을 추곤 하는데. 아무렴 처음 만난 팀원들과 첫 회식 자리에서 미간을 꿀렁일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자꾸만 와하는 감탄사와 함께 어깨가 들썩여지는 걸 숨길 수가 없는 거예요. 순간 반대편에 앉아 계셨던 선배님이 피식하고 저를 보고 웃는 모습에, 아 들켰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온을 찾고자 냉수 한 컵을 들이 마셨습니다. 활어회는 정말 맛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