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안도 방심하지 말 것
평수를 넓혀 이사한 집에서 뒹굴거리던 어느 주말이었다.
형님 부부께서 우리 집 근처에 사시는 시댁에 들른 김에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연락이 왔다. 당시 우리 아들은 돌도 안 된 시기여서 나는 외식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잠깐의 외출이라도 아기와 관련된 용품을 바리바리 챙겨야 하고, 아기가 보채기라도 하면 식당 안팎을 들락거리면서 달래느라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게 뻔했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것이 어떠냐고 여쭈었고 이에 모두 동의했다.
예정에 없던 시댁 식구 방문을 앞두고 집안을 둘러보니 손님을 초대할 만한 집 상태가 아니었다. 그들이 우리 집에 당도하기까지 내게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도 되지 않는다.
일단 손님이 오면 거칠 수밖에 없는 공간 위주로 정리하기로 했다. 현관에 나와 있는 신발을 모두 신발장 안에 넣고 바닥의 모래 알갱이들을 닦아낸다. 편백나무 탈취제를 뿌려 퀴퀴한 냄새를 덮는다. 얼른 화장실로 들어가 세제가 묻어 있는 청소용 수세미 한 장으로 거울, 세면대, 욕조, 변기 순서로 재빠르게 청소한다. 수건으로 세면대와 욕조 표면에 고인 물기를 닦고 스퀴지로 바닥을 쓸면 금세 건조된다. 두루마리 휴지가 여유 있게 남았는지를 확인하고 보송보송한 새 수건을 꺼내 걸어 놓으면 욕실 청소가 마무리된다.
남편이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하는 동안 나는 싱크대 상판 위에 무질서하게 올라와 있는 식기를 찬장 안에 몰아넣고 소독수를 뿌려 상판에 찌든 기름때를 닦는다. 뒷베란다로 나가 빨래 바구니 밖으로 넘쳐 나온 빨랫감을 통돌이 세탁기 안에 모두 쏟아붓고 덮개를 닫는다.
아차차, 베란다에 쌓여 있는 소주병이랑 맥주캔은 검정 봉투에 담아 구석에 감춰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딩동.
초인종이 울린다. 제자리를 잃고 여기저기 걸려 있는 외투와 잠옷은 급한 대로 옷장 안에 쑤셔 넣은 뒤에 문을 연다.
"어서 오세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손님을 맞이하지만 한 시간 만에 볼이 움푹 패인 기분이다.
주문한 중국 요리가 도착할 때까지 시댁 식구들은 우리 집에 처음 온 것처럼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며 집 구경을 한다.
"동서네는 애 키우는 집 같지 않게 늘 집이 깨끗해. 주방에도 뭐 하나 올라와 있는 거 없고. 살림은 하고 사는 거 맞지?"
형님의 말에 나는 원래 이렇게 산다는 듯이 어깨를 한 번 으쓱 올리며 웃었다. 그런데 아주버님의 동선이 심상치가 않다. 우리 어머님도 열어보지 않은 냉장고를 열어 위아래로 스캔하더니 그 옆에 있는 뚜껑형 김치 냉장고까지 열어 안을 들여다본다. 냉장고에 갇혀 있던 김치 쉰내가 집안에 스멀스멀 퍼졌다. 오 마이 갓. 냉장고는 주부의 자존심이 걸려 있는 구역 아닌가. 냉장고 점검(?)을 당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기에 당황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주버님이 자연스럽게 안방으로 이동한다.
"어? 옷장 새로 들였나 봐요?"
눈썰미 좋은 아주버님, 얼마 전에 새로 짜 맞춘 붙박이 옷장에 관심을 보인다.
'어? 어? 거... 거긴 안 되는데?'
말릴 새도 없이 장롱 문을 열어젖히는 아주버님.
망했다. 아까 마구 처박아 둔 옷더미가 '어서 와. 이런 옷장 안은 처음이지?' 하고 음흉하게 웃고 있다. 문제는 옷더미 사이에서 내 살색 브래지어가 캡이 구겨진 채로 아주버님을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아주버님은 황급히 옷장 문을 닫았고, 나는 그런 아주버님을 못 본 척하고 딴청을 부렸지만 붉어진 얼굴은 감출 수가 없었다.
'살림꾼인척 하면서 보이지 않는 곳은 엉망진창으로 해 놓고 산다고 생각하실 거야. 이따 형님한테 내 흉보겠지?'
아니, 사실 그것보다는 매력도, 멋도 없이 낡아빠진 브래지어를 들킨 게 더 수치스러웠다. 딱 보아도 깨끗하게 빨아 단정하게 넣어 둔 것이 아닌, 몇 번 입고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게 너무나도 티 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들 집으로 배달된 음식을 맛있게도 먹던데, 나는 그날 시킨 게 일반짜장인지 간짜장인지, 유산슬 맛은 괜찮았는지, 고추잡채에 꽃빵은 몇 개나 올라가 있었는지 같은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약 10년 전) 받은 충격으로 보이지 않는 공간에 조금 더 신경 쓰게 되었다. 옷장을 나누고 있는 섹션 한 칸만이라도 틈틈이 매만지면 대대적인 정리는 따로 할 필요가 없다. 오늘은 요가복이 있는 칸 하나를, 내일은 양말과 속옷이 있는 칸 하나를 정리하는 식이다.
목 늘어난 티셔츠, 구멍 난 양말, 보풀이 잔뜩 일어난 니트가 눈에 띄면 '한 번 더 입고 버려야지' 하지 않고 그때그때 버린다. 정리의 핵심은 물건의 가짓수를 관리 가능한 범위 내로 유지하는 거다.
옷장 안에서 잠자는 섬유 먼지는 마른걸레나 청소용 부직포를 이용해 수시로 닦아주는 것이 좋다.
이렇게 습관을 들인 덕에 이제는 그 누가 옷장을 불시점검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은 해 놓고 산다.
아, 말 나온 김에 이번 주엔 한결같은 내 취향을 반영하는 노 와이어 민무늬 부라자와 작별하고 컬러풀하고 섹시한 속옷 몇 개 장만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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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가까운 가족, 친구 사이여도 남의 집 냉장고나 옷장, 창고 등을 열어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샤워하고 있는데 노크 없이 누군가 훅 들어온 기분이랄까. 친정 엄마도 예외는 아닙니다.
개인의 은밀한 공간은 서로 존중해 주자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