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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라, 나의 셀린느 (1)

명품 가방이 무슨 죄라고

by 춤몽 Mar 07. 2025

 

 A와 나는 같은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복도를 지나다 서로의 사무실 책상에 캔커피와 초코바 같은 걸 올려놓을 정도의 호감을 서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크리스마스가 다가왔고, 그는 내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나타난 그의 손에는 커다란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추위를 피해 자리 잡은 시끌벅적한 바(bar)에서 그는 내게 선물 상자를 건넸다. 조심스레 연 상자 안에는 명품 백이 다소곳이 누워 있었다.



 별 거 아니라는 말 대신 '큰맘 먹고 샀다'라고 너스레 떠는 것으로 보아 가방의 몸값이 상당하리라 추측했다. 선물이라 하니 고맙게 받아 들었지만 사실 사회초년생이었던 나는 명품에 별 관심이 없었기에 크게 좋지도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A는 내가 가끔 엄마에게서 빌려 들고 간 가방 때문에 명품을 좋아하는 줄 알았던 거다. 엄마가 그거 남대문에서 산 짝퉁 루이뷔통이랬는데.)


 오래전 기억이라 흐릿하지만 아마도 A와 나는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자연스레 연인으로 발전했던 것 같다. 따로 고백을 받은 기억은 없는데 말이다. (그에게서 명품백을 받아 든 게 OK 사인이나 다름없었으려나...?)


 처음엔 윤이 반지르르 흐르는 빳빳한 가방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웠지만, 날마다 직장에 열심히 메고 다녔다. 내 어깨에서 빛나는 셀린느를 보고 A 흡족해했다.


 실제로 들고 다녀 보니 왜 명품, 명품 하는지 알게 됐다. 아무리 험하게 메고 다녀도 셀린느의 소가죽은 늘 새것 같은 컨디션을 유지했다. 물 빠진 청바지에 면티 쪼가리를 입고도 셀린느를 메면 보는 사람들마다 고급스럽다, 귀티 난다 했다.



 80년 역사를 자랑하는 셀린느의 가죽은 견고했으나 우리 사이는 그러하지 못했다. A와의 연애는 3년 만에 끝이 났고 내게 남은 건 상처와 배신감, 14K 커플링, 그리고 셀린느뿐이었다.




 이별 후에 옮긴 새로운 직장은 복장에 제약이 없는 곳이었지만, 나 편하자고 백팩을 아무렇게나 메고 다니고 싶지 않았다. 나의 셀린느는 서류 뭉치와 화장품 파우치 등을 넣고도 남는 넉넉한 크기인 데다 정장, 캐주얼 복장에 두루 어울려  애착 가방으로 자주 들고 다녔다.


 그러나 악동 뮤지션의 노래 제목처럼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할 수 있겠는가. 어느 날부터인가 셀린느에서 전 남친과의 추억, 아픔, 원망, 미련이 뒤섞인 감정이 묻어 나왔다. 가방잘못이 없다며 마인드 컨트롤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렇다고 상태 좋은 멀쩡한 명품백을 아파트 의류수거함에 내다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한 뒤에도 셀린느는 장롱 한쪽을 차지하고서는 잊힐 만할 때쯤 한 번씩 빛을 보았다.

 잘 쓰지 않는 장롱 칸을 어쩌다 열었다가 가방과 눈이 마주치면 나 혼자 흠칫 놀라 황급히 문을 닫았다. 전 남친에게서 받은 처분하지 못한 물건 때문에 남편 몰래 장롱에 내연남이라도 숨겨둔 기분이 들었다. 


 일본의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는 물건을 정리하는 기준의 하나로 설레지 않으면 과감히 버리라하였다. 셀린느는 이제 나를 설레게 하기는커녕 찝찝함 불쑥 솟게 만드는 애물단지가 되었기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래! 볼 때마다 부정적인 감정이 든다면 그 아무리 명품이라도 내 인생에서 정리해야겠어.'


 그때 우연히 소유물을 개인 간 거래로 쉽게 사고팔 수 있플랫폼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당근마켓 초창기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 물건을 대체 얼마에 내놓아야 할지 감이 전혀 없었던 나는 며칠을 고민하다 여행을 앞두고 덜컥 사고를 치고 말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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