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 전 호주머니 3초 점검
"띠리리 띠리리리잉~"
의류 건조기 알림음이 울린다. 건조기를 돌리고 외출을 했다면 몰라도 집에 있을 때는 건조 종료 알림음이 울리면 곧바로 건조기에서 옷을 빼낸다. 그렇지 않으면 건조기 내부에 남아있는 열기를 옷이 빨아들여 다시 눅눅해지기 때문이다. 옷을 꺼내 바로 개지 않고 뜨뜻한 방바닥에 몇 시간에 널어놓는다. 섬유 사이에 숨은 잔열을 모두 날려야 옷감이 뽀송뽀송해진다.
몇 주 전 발생했던 작은 사건으로 인해 도입한 '세탁 전 3초 루틴'으로 오늘도 무사히 건조까지 마쳤다.
몇 주 전 그날.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건조기 알림음에 몸이 자동으로 반응하고 세탁실로 갔다. 건조기 문을 열자마자 달콤한 향기를 머금은 열기가 훅 쏟아져 나왔고, 이어서 작은 물체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포장이 반쯤 벗겨진 초콜릿이었다.
'엥?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상황 파악을 맡은 뇌 영역이 버퍼링 걸렸다가 곧 정상 작동한다. 생각났다. 전날 탁구장에서 한 회원이 당 섭취 하라며 내 손에 쥐어준 가로 세로 3센티미터의 정사각형 초콜릿. 운동 끝나고 먹어야지 하고 바지 주머니에 넣어 놓은 것을 잊고 그대로 세탁실에 던져 놓은 것이다.
세탁기 안에서 뜻밖의 찬물세례를 받은 뒤, 건조기에서 푹 지지고 나온 초콜릿이 온전할 리 없었다. 옷을 꺼내 보고 좌절했다. 하필 그날 세탁 건조한 것은 모두 흰색 의류였다.
남편의 흰색 셔츠에 얼룩무늬가 생겼다. 연핑크 잔꽃무늬가 퍽 맘에 들어 지난달에 큰맘 먹고 구입한 내 잠옷에 흑색 꽃이 피었다. 조그만 초콜릿 하나가 이 옷 저 옷 사이를 탐험하며 흔적을 알뜰히도 남겼구나...
포장지에는 흐물흐물하게 녹은 초콜릿이 새끼손톱만큼 남아 있었다.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라면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깔깔거리며 TV를 보고 있던 아들을 당장 내 눈앞에 불러 세워 초콜릿 포장지를 신경질적으로 흔들며 질책했겠지. 아들이 소행이 아니라면 초콜릿 인증샷을 찍어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남편에게 카톡 테러를 했을 테고.
하지만 이날은 용의자가 명확했으니 추운 세탁실에 쪼그려 앉아 내 머리칼을 쥐어뜯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초코향을 품은 마른 옷가지는 영문도 모른 채 멱살이 잡혀서는 다시 세탁기로 끌려 들어갔다.
사실 세탁기나 건조기에서 의류 이외의 것들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무심하게 세탁실에 벗어둔 바지 주머니 속에서 나온 것들을 나열해 보자면, 언제 어디서나 머리를 묶을 수 있도록 챙겨가는 까만 고무줄, 체크카드 잔액이 부족할 때 쓸 비상금, 강아지와 산책할 때 필요한 휴지 몇 장, 무엇인가 구입한 후 받은 종이 영수증 등이다.
고무줄은 건조기 필터에 걸러져 온전한 상태로 발견된다. 돈세탁을 하고 나온 만 원짜리 지폐는 이전보다 깨끗해진다(아직까지 가치를 상실할 만큼 훼손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휴지라면 좀 골치 아프다. 세탁 과정에서 물에 의해 분해되었다가 건조 과정에서 옷 이곳저곳에 달라붙는다. 다행히 바짝 말라붙어 있어 돌돌이로 쓱쓱 밀면 떨어지긴 한다. 하지만 옷 여러 벌에서 휴지 조각을 하나하나 찾고 떼어내는 데 품이 많이 든다. 휴지 품은 세탁물이 검정 옷이라면...
아, 생각하기도 싫다.
옷 한 벌에 기껏해야 호주머니 두 개 달렸을 뿐이다. 왼쪽,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 데 3초도 걸리지 않는다. 일이 벌어진 후 자책하는 짓 그만두고, 빨래 바구니에 옷을 던져 넣기 전에 호주머니를 한 번만 뒤져보면 되는 것을.
이중 세탁으로 수도와 전기와 멘탈을 날려버린 초콜릿 사건을 계기로 '호주머니 3초 점검'을 습관화하는 중이다. 불필요한 노동으로 버려질 미래의 내 소중한 30분, 오늘의 내가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왼쪽 한 번, 오른쪽 한 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