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야, 엄마 숨 좀 쉬고 올게
아기띠를 하고 아파트 단지를 산책했다. 아파트 두 개 동 한가운데에 미끄럼틀 하나 달랑 있는 놀이터 주변을 서성이며 품속의 이 아기는 언제쯤에나 만세 부르며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올 수 있을까 생각했다.
팝콘처럼 꽃망울을 터트린 매화나무를 한참 올려다봤다. 아, 벌써 봄이구나.
아기는 정수리에 따끈한 점심 햇살을 얹고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우유를 배불리 먹고 나와서 졸음이 쏟아지는 모양이다. 나는 양쪽 소매를 걷어붙이고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게 둔 자세로 벤치에 걸터앉았다. 기미가 생기거나 말거나 눈을 감고 태양과 얼굴을 마주했다. 이마와 광대, 양 팔뚝에 햇살이 구석구석 스며들게 해야 한다. 얼마 전 피검사 결과를 들으러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가 나에게 비타민D 수치 개선을 위해 매일 최소 20분 햇빛을 쬐라고 했다. 선크림을 바르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5분이 지났다. 몸 안에서 굳어 있던 피가 서서히 돌기 시작한다. 10분이 지났다. 세로토닌이 퐁퐁 솟더니 가슴에 긍정이 번진다. 그래,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인생이야. 15분이 지났다. 아이가 칭얼거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까지 뒤로 젖히고 빽빽 울기 시작한다. 작은 생명체의 비명이 아파트 전체에 울려 퍼진다.
경비실에 민원 넣는 게 취미라는 한 노인이 놀이터 바로 앞에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성격만큼이나 뾰족한 턱을 가졌을 노인 얼굴을 상상하니 덜컥 겁이 난다. 벌떡 일어나 엉덩이를 털고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그래, 그래. 어서 집에 가자.
의사 말 잘 듣는 착실한 환자가 되려 했는데 오늘도 고작 20분을 못 채우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기지개를 켜며 창밖을 내다봤다. 저 멀리 우뚝 솟은 북한산 봉우리가 오늘은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는다. 핸드폰에 뜬 미세먼지 수치를 확인한다. 미세먼지 나쁨.
언제부터 대한민국 공기가 이렇게 저질이 되었는가. 내게 한국어를 배운 중국 유학생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서울은 공기가 깨끗해서 살기 좋다고 말한 게 불과 몇 년 전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나저나 오늘도 어제처럼 아기랑 산책 나가려고 했는데. 목련꽃 봉오리가 얼마나 영글었는지 봐야 하는데. 하루 중 유일한 내 힐링 타임인데.
20분 쓰는 것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현실을 개탄하며 베란다에 서서 창문을 열지 말지 고민했다. 미세먼지 심한 날 환기를 하는 게 나을까, 창문 꼭꼭 닫고 사람의 체취와 생선 비린내와 사물에 앉은 먼지를 집에 가두는 게 나을까.
창문 한 장 열지 말지를 두고 이렇게까지 고민할 일인가 싶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거실에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모빌이 작은 인형을 달고서 빙글빙글 돈다. 그 속도에 맞춰 내 마음도 빙글빙글 돈다. 멀미가 난다. 산소 부족인가. 호흡 곤란이 올 것만 같다.
에라, 모르겠다.
커다란 통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숨을 한번 크게 몰아쉰다. 모빌 아래에 누워 양팔을 뻗어 인형을 잡으려 애쓰는 아기를 슬쩍 내려다본다.
아가야, 미안. 엄마가 지금 당장 마음 환기가 필요해. 딱 10분만, 아니 딱 5분만 고 작고 귀여운 콧구멍을 닫아줄 수 있겠니? 엄마 코끝에 흙냄새 묻은 바람이라도 닿아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아.
아가야, 미안. 5분만 내게 시간을 주렴.
(2017년 초봄 어느 날의 기억.)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라도 잠깐이라도 환기하는 게 좋다고 합니다. 하루종일 창문을 닫아 놓으면 이산화탄소, 라돈, 휘발성 유기화합물 등이 쌓여 집안 공기가 바깥보다 나빠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실내 환경에서는 호흡기 질환, 두통, 피로감이 더 심해질 수 있어요.
하루 중 비교적 미세먼지 농도가 낮은 오전 10시경, 오후 7~8시경에 10분이 넘지 않도록 짧게 환기합니다. 이때 공기청정기를 함께 사용하면 미세먼지로 인한 실내 공기 오염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