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여행 3일 전
사흘 전에 냉장고를 열어보고 숨이 턱 막혔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냉장고 속에 뭔가가 채워지는 속도는 놀랄 만큼 빠르다. 평소에 식재료를 엄청나게 사 들이는 것도 아닌데 우리 집 냉장고는 왜 항상 포화상태인 걸까?
첫째, 나에게 있어 냉장고 정리는 하기 싫은 집안일 best 3 안에 들기 때문에 미루기 일쑤다. 둘째, 최근에 외식과 배달 음식 주문 횟수가 부쩍 늘어 냉장고 속 식재료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원인이다. 냉장고가 식재료의 신선도를 천년만년 보장할 리 없건만 일단 냉장고에 무언가 저장하고 나면 눈 딱 감고 몇 날 며칠 모른 체하는 건 일도 아니다.
이럴 땐 정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용해야 한다. 냉장고를 정리하기에는 장기 여행 직전만큼 좋은 때가 없다. 내일부터 열흘 동안 나는 한국에 없다. 해외여행을 앞두고 3일 전부터 냉장고를 야금야금 파먹는, 일명 '냉파'를 시작했다.
[냉장고 정리 1일 차, 여행 사흘 전]
일단 '버릴 것'과 '냉파 재료'를 구분한다.
희끄무레하게 곰팡이가 앉은 콩자반과 유통기한 지난 요거트, 물컹해진 파프리카 반 개와 곤죽이 되어버린 단감 세 개가 나왔다. 남편에게 들키지 않게 검정 봉투에 담아 묶어 세탁실에 내놓았다. 헤픈 마음으로 구입했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관리 소홀로 어림잡아 만 원어치의 식재료가 버려지는 거라 죄책감이 든다.
야채칸을 열었다. 4분의 1토막 남은 무의 겉면이 거뭇해져 있다. 껍질을 깎아 버리고 정사각형 모양으로 납작납작 썬다. 뒤이어 나온 애호박 반개는 투박하게 숭덩숭덩 썬다. 물기 맺힌 느타리버섯도 돌아가시기 전에 모셔온다. 냉동실에서 잠자고 있는 우삼겹을 꺼내 위 재료와 합치면 된장찌개 재료로 훌륭하다. 늦은 아침으로 찌개를 맛본 아들이 두 그릇이나 먹었으니 썩 만족스러운 냉파다.
조금 쪼글쪼글해졌지만 아직은 먹을만한 사과 두 알을 후식으로 깎아 냈다. 강아지가 제일 먼저 달려와 식탁 밑에서 내 무릎을 박박 긁어댄다. 녀석도 가족의 일원으로서 냉파에 일조하겠다는 집념을 보인다.
[냉장고 정리 2일 차, 여행 이틀 전]
김치 꼬다리가 조금씩 남아있는 락앤락 밀폐용기가 세 개나 나왔다. 김치를 한 데 모으니 세 식구 김치볶음밥용으로 소진할 수 있겠다. 명절에 들어온 스팸 한 캔 쫑쫑 썰어 넣으면 꽤나 사치스러운 한 끼가 되겠지.
냉동실에는 얼마 전 이모가 보내주신 손만두 한 팩과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가래떡 두 줄이 '우린 세트요.'하고 얌전히 대기하고 있다. 냉장실에서 굴러다니던 달걀 두 알이 기분 좋게 등장할 타이밍이다.
삼총사가 모이면 뭐다? 신정에도 먹고 구정에도 먹은 떡만둣국, 올해 벌써 세 번째 등장이다.
[냉장고 정리 3일 차, 여행 하루 전]
3일 만에 냉장고가 눈에 띄게 헐렁해졌다. 위칸부터 훑어 내려오던 내 레이더망에 열무김치가 걸렸다. 두 계절이 지난 상태라 시어 꼬부라졌겠구나 하고 한 줄기 집어 맛을 보았다. 시기는커녕 지금 바로 먹기 딱 좋게 익었다. 뒹굴거리는 아들 엉덩이를 두들겨 일으켜 냉면 심부름을 시켰다.
냉장고 깊숙한 곳에서 몸을 사린 덕분에 주연급 조연으로 거듭난 열무김치를 물냉면 위에 듬뿍 얹고 김치 국물도 두어 숟가락 넣어 먹으니 별미다. 삶은 달걀 반쪽이 몹시 아쉬웠지만 어제 떡만둣국 고명으로 소임을 다했기에 곧 미련을 거둔다.
즉석으로 조리해 먹는 우동은 유통기한이 임박해서 냉장실에서 냉동실로 옮겨 놓았다. 여행을 마치고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간편하게 해 먹을 수 있는 대안 하나쯤은 있어야 하니까.
마르셀 프루스트는 '우리는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야 비로소 익숙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깨닫는다'라고 하였지만, 긴 시간 집을 비우고 돌아왔을 때 나를 맞이하는 공간이 정돈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면 여행의 여운은 증발하고 피로도는 두 배가 될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익숙한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기 위해서는 여행 직전에 평소보다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까지 완벽하게 마쳤다. 내일 새벽에 집을 나서기 전에 침구에 붙은 머리카락을 돌돌이로 떼어내고 페브리즈를 뿌리는 일만 남았다.
열흘 후에 나는 우동 한 그릇 후루룩 말아먹고 침대 위로 지친 몸을 던질 거다. 보송한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려 덮고 지루하게만 여겼던 내 집에서의 일상을 꼭 껴안아주는 단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냉장고 지도를 그려 몇 번째 칸에 무엇이 남아있는지 재고 파악을 하면 중복 구매를 피하고, 있는 재료를 사용해 요리할 수 있어서 식자재 낭비를 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처럼 냉장고 지도를 그리는 것조차 버거운 귀차니스트라면 이렇게 해 보세요. 장을 본 후에 받은 영수증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냉장고에 붙여둡니다. 소진한 재료를 영수증에서 그때그때 지워나가면 무엇이 남았는지, 무엇을 사야 하는지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어요. 단, 이 방법은 장기 보관 식품을 관리하는 데에는 적절하지 않아요. 두부, 우유, 야채, 과일 등 가정에서 반복해서 자주 구매하는 식품을 관리하기 위한 용도로 활용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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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여행 떠나기 전날에 써서 저장한 글입니다.
열흘이 믿기지 않는 속도로 지나갔네요.
어제 밤늦게 집으로 복귀한 저희 가족은 피곤에 절어 우동 한 그릇 먹지 못하고 곯아떨어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