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들이 말을 걸 때가 있다. 아마 대부분 밥 달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잠깐 눈을 마주쳤다가, 이내 딴청 부리고는 했다. 얼핏 알아들은 척 일종의 장난이었다. 딴에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게 고양이들에게 어떻게 보였을지는 잘 모르겠다.
반면에 내가 말을 걸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원래도 과묵한 편이지만, 시골에서는 대화할 일이 없었으니까. 고양이들이 한국어를 이해할 길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이번 세기에는 불가능할 거라 믿는다. 그러니 내가 섬기는 어떤 단어도 고양이들을 기쁘게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 생각에 그건 일종의 공생 관계였던 것 같다. 교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건조했으니까.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조금씩 교환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썩은 갯벌을 뒤적이며 음식물 쓰레기를 두고 아귀다툼할 시간, 그리고 내가 나 대신 무언가가 될 수 있었던 시간. 적어도 나에게는 아주 유익했다.
어떤 면에서 생각해보면 고양이는 사람처럼 굴 때가 많았다. 아니면 사람이 고양이처럼 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전에도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을 것이다. 고양이들은 갑작스러운 행운을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바닥에 놓인 음식을 보고 한참을 서성이며 고민하는 모습을 봤다. 그 모습은 마치 믿지 못할 행운과 맞닥뜨린 사람처럼 보였다.
물론 그건 고양이들이 처한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포식자인 동시에 피식자인 나의 이웃들은 의심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삶을 살아왔다. 유전자를 타고 내려온 뿌리 깊은 본능에 따라 행동했던 것이다.
어떤 날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옥상을 한참이나 올려다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내가 널어놓은 검은색 데스크 매트가 걸려 있었다. 아마 독수리나 매가 앉아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한참을 못 박혀 있길래 직접 올라가서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그러나 고양이는 믿지 않았다.
자신보다 체구가 작은 녀석을 괴롭히는 고양이도 있었다. 둔하고 눈치가 없는 편이라 종종 쫓겨 다니는 녀석이었다. 나는 녀석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장난감을 만들어줬다. 회색 양말에 헝겊과 개박하를 채운 들쥐 모양 인형이었다. 아쉽게도 특별히 효과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사실 내가 만들었던 대부분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박스를 잘라서 스크래쳐로 만들거나, 나무토막으로 캣 타워를 꾸며본 적도 있다. 온종일 씨름했지만 시큰둥한 반응에 시무룩해지기 일쑤였다. 그건 집고양이들에게나 필요한 물건이었다.
들고양이에게는 동료와 충분한 음식 외에 더 필요한 것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전에 고양이가 모두 혼자 생활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소안도의 고양이들은 대부분 삼삼오오 짝을 이뤄서 모여 다녔다. 혼자 다니는 것은 사나운 싸움꾼 몇몇뿐이었다.
그들은 모여서 서로 얼굴을 부비거나 낮잠을 자고는 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동시에 꽤 곤란한 문제였다. 밥을 먹을 때 한사코 서로의 그릇을 탐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그릇에 사료를 부어줘도 한결같았다. 덕분에 칸막이 급식소만큼은 꽤 효과를 봤다. 만들었던 것 중에 유일하게 쓸모 있는 물건이었다.
아직도 손등에는 고양이가 할퀸 흉터 자국이 남아있다. 사료를 부어주다가 생긴 일이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손등에 박혔을 때 딱히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지금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런 관계였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누군가와 대화하다가 문득 그 상처를 내려다보고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