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계획은 이랬다. 초록색 플라스틱 잔에 담긴 물이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그게 여름이라는 것을 알았어. 이 문장으로 제목을 쓰고 싶었다. 글자 수 제한에 걸리기 전까지는 꽤 훌륭해 보였다. 그래서 본문에나마 적어놓기로 했다.
그렇게 쓰기는 했지만 나는 사실 여름을 싫어한다. 더위도 습기도 습기에 젖은 바람도 싫다. 모기를 비롯한 벌레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나이가 조금 들어서는 에어컨 냉기와 선풍기 바람도 싫어졌다. 8월에 태어난 탓에 그토록 계절을 타는 모양이다.
소안도의 여름도 꽤 혹독했다. 그곳에 있는 오래된 집은 흙으로 지었다. 기둥은 당연히 통나무였다. 일부 벽면을 시멘트로 보강해놓기는 했지만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었다. 장마철 태풍 불던 날에는 집이 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것은 바로 곰팡이였다. 안방에는 나무 기둥 뿌리가 벽을 뚫고 튀어나와 있는 곳이 있었다. 그 밑동은 썩어서 새까맣고, 위로 주황색 곰팡이가 진득하게 피어올라 있었다. 땅에서부터 천천히 독소가 올라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뒷방 전황은 조금 더 절망적이었다. 집 뒤편에는 둥글고 넓적한 돌을 쌓아 올린 담벼락이 있었다. 집과 담 사이 좁은 골목은 이끼가 낄 정도로 습했다. 장마철에는 그곳으로 빗물이 흘렀다. 아마 오랫동안 들여다본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거미조차 떠나버린 폐허에 고양이 배설물이 얼룩처럼 번져 있는 곳이었다. 거기서부터 스민 지독한 습기가 벽을 옭아매고 있었다. 녹아내린 벽지를 검은색 곰팡이가 대신하려는 듯 보였다.
빨간 통에 담긴 곰팡이 제거제를 다섯 통도 넘게 썼던 것 같다. 덕분에 곰팡이를 어느 정도 밀어냈지만 잠시뿐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곳은 또다시 검게, 혹은 하얗게 뒤덮일 터였다. 벽돌 모양 하얀색 폼 블록을 사서 보이지 않게 덮어두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일을 처리한 다음 날 나는 마루에 앉아서 마당을 보고 있었다. 간밤에 있었던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양이들이 그늘에서 졸고 있었다. 정오의 열기에 땀이 흘러내렸다. 볕에 걸어놓은 색색의 수건이 오븐 속 빵처럼 익어갔다.
여름철 바닷가 날씨는 아주 변덕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볕 아래 빨래나 이불을 널어두었다. 마당이 있어서 편리한 점 중 하나였다. 잘 마른 이불에는 잠시나마 햇살이 배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른한 기분이었다. 손에 든 잔에는 사과 맛 아이스티가 들어있었다. 금방 녹아버린 얼음 중 일부가 유빙처럼 떠다녔다. 덕분에 모든 일이 순탄한 것처럼 느껴졌다. 여름을 꽤 성공적으로 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잔을 비우고 거기에 물을 채워둔 다음 마당으로 나갔다. 갈라진 시멘트 사이로 잡초가 자라고 있었다. 강아지풀이나 씀바귀 같은 식물이었다. 보는 사람마다 뽑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은 나보다 오랫동안 그 집을 지키고 있었을 테니까.
잠시 서 있었을 뿐인데도 피부가 화끈거렸다. 마당의 오른편에는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었다. 그 집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진 공간이었다. 덕분에 그곳만큼은 청소가 거의 필요하지 않았다. 마당에 물을 조금 뿌려놓을 요량으로 샤워실에 들어갈 때까지 그렇게 믿었다.
하얀 타일, 변기와 세면대 위로 검은색 얼룩이 번져가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쉰 다음 그늘에 주저앉아 마루를 올려다봤다. 방금 따라놓고 온 물이 투명한 초록색 플라스틱 잔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