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산다고 말하면 열에 아홉은 무인도를 떠올리는 것 같다. 소안도에 자그마치 천여 가구나 산다고 말하면 다들 놀라고는 한다. 그래서 나는 의외라는 듯 놀란 목소리와 약간의 실망감 섞인 표정들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것이 순전 억측인 것만은 아니었다.
바닷가에서는 닭이 울기도 전에 아침이 오는 것 같다. 새벽 4시면 벌써 담 너머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놀란 새소리가 뒤를 잇고 느지막하게 동이 튼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모두 바다로 간다. 막이 오른 마을은 인적이 없다. 무대 위에는 나와 오롯이 적막뿐이다. 서로 다른 시간에 사는 것처럼 사람과 마주칠 일이 없다.
나는 그제야 슬슬 잘 준비를 시작한다. 동틀 녘 차가운 공기를 피해 이불속으로 파고들 시간이다. 자그마한 온기에 이끌려 사라지는 길, 천천히 가라앉는다. 거기에는 마치 바닥이 없는 것 같다.
수마의 미로를 헤매다가 정오가 되면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높고 간드러진 울음에는 얼마만큼 예의가 배어 있을까. 고양이들은 한참을 부르면서도 결코 소리를 높이거나 문짝을 긁지 않는다. 한참 불러도 아무 반응이 없으면 썩은 나무토막에 앉아 상념에 잠기거나, 돌무더기 옆에 누워 볕을 쬔다.
호박을 닮은 밝은 주황색 털, 짙은 잿빛과 하얀 양말,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검은색 얼룩 등등 내가 기억하는 방식은 보통 색깔이다. 비슷한 털을 가진 고양이는 크기나 얼굴로 구분하기도 한다. 한 번도 이름을 지어준 적은 없다.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기 위해 구태여 치즈냥이나 얼룩냥 같은 이름으로 부른 적은 있다. 그러나 내가 고양이들에게 그런 약칭을 불렀다가는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 고양이들은 자신이 아는 한 가장 한심한 강아지들 보다 못난 생물을 대하듯 나를 올려다봤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를 인디언처럼 부를지도 모른다. 인간이 맡을 수 없는 특유의 체취가 이름일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든 나는 결코 부를 수 없는 종류겠지. 이 문제로 꽤 오래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마침내 고양이들에게 이름 같은 건 없을 거라고 결론지었다. 그건 인간에게나 필요한 거니까.
고양이들이 소안도에 살게 된 것 역시 인간의 필요에서였다. 천적은 야생의 뱀뿐이던 시절이 쥐들에게는 천국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뭍에서 전문가를 초빙했을 때도 이 호시절이 이어졌다. 집마다 난 미로 같은 쥐구멍에 고양이는 들어갈 수 없었으니까.
일이 없으니 삯을 주는 사람도 없다. 천덕꾸러기 신세다. 비 오는 날이면 처마 밑에서 청승, 눈 오는 날이면 집 뒤편 보일러 앞에서 골골이다. 볕 좋은 곳에서 잠시 쉴라치면 개들에게 쫓기고 지붕에 오르면 사람에게 쫓긴다. 이곳 사람들과 나눴던 두 줌도 안 되는 대화 중 하나는 고양이들에 대한 험담이었다.
그래서인지 처음 내 이웃들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모퉁이에서 반쯤 고개를 내밀고 관찰하다가도 조금만 움직이면 부리나케 달아나버린다. 어떤 고양이들은 여전히 내가 곁에 있을 때 밥을 먹지 않는다. 밥만 놓고 가라며 하악 성을 내기도 한다.
소안도에 사는 대부분의 고양이는 갯벌에 버려진 음식물 쓰레기를 먹고 사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대접했던 건 동정심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이 간직하고 있던 이야기 한 구석에 잠시 머무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시해도 괜찮을 만큼 사소하고 자그마한 역사에 함께해서 나는 꽤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