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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Doe May 02. 2022

남쪽 섬 자락에 일렁이는 파도는 과묵하게 오래도록

부모님을 모시고 속초에 다녀왔다. 엄마가 방송에서 도토리 탕수육을 봤다고 했다. 강릉에 있는 식당이라 일대를 둘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바다를 보며 잠드는 상상을 했다. 그래서 잠자리에 조금 더 투자해보고 싶어졌다.


숙소에는 시대감이 느껴지는 장롱과 화장대가 있었다. 덕분에 4층 창밖으로 보이는 파도가 구한말에서부터 흘러오는 것 같았다. 햇빛 머금은 유구한 바다 위 맑은 하늘에 구름이 하나나 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나 밤이 오자 한나절 누렸던 호사가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상황이 바뀌었다. 오래도록 으르렁대는 파도 소리에 한숨도 잠들 수 없었다. 나는 들어가는 문을 잊어버린 것처럼 새벽을 헤맸다. 소안도의 바다가 얼마나 조용했는지 그때 깨달았다.


첫날에 나는 간신히 잘 곳만 청소를 마쳤다. 오래되어 아무것도 빨아들이지 못하는 청소기와 곰팡이 핀 수건들 사이에서 한참이나 씨름한 결과였다. 


비어있던 집은 먼지와 곰팡이로 가득했다. 먼지가 쌓이지 않는 곳에는 바퀴벌레 배설물, 쥐가 뜯어놓은 잔해들이 북적였다. 소리도 없이 기척도 없이 집은 망가져 가고 있었다. 할머니도 그렇게 된 일이었을까.


긴 시간 고여 있던 습기가 빈집의 주인처럼 느껴졌다. 눅눅한 이불과 녹아내린 벽지에는 겨울바람보다 시린 한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외투까지 입은 채로 집에서부터 이고 온 홑이불 한 벌에 몸을 뉘었다.



잠자리가 바뀐 것 치고도, 집이 뒤숭숭한 것 치고도 숙면이었다. 한나절 내내 고생한 탓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바다의 배려였나 보다. 파도가 소리도 없이 밤새 썰물과 밀물을 삼켰던 모양이다.


나도 청소하며 그 파도를 닮아갔는지도 모른다. 일주일을 말도 없이, 온전히 집을 쓸고 닦았다.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오물들을 벗겨냈고, 곰팡이와의 전쟁에서 선전했다. 그러나 냉장고를 비우면서는 슬펐다.


거기에 들어 있던 가장 신선한 음식조차 이미 3년 전에 유통기한이 지난 상태였다. 나는 비누에도 곰팡이가 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할머니가 얼마나 천천히 허물어져 갔는지 청소하는 내내 지켜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겪어보지 못했던 날들의 향수를 느끼기도 했다. 신줏단지처럼 모셔놓은 1세대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집안에서 끌어냈다. 젊은 날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되었던 아버지가 사 온 물건이었다. 아마 그 구식 텔레비전은 오랜 시간 동안 할머니의 보물이었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양의 그릇을 닦아놓은 일은 꽤 자랑스러웠다. 쌓아놓으면 천장에 닿을 것처럼 많은 접시는 상태가 훌륭한 편이었다. 혼자 사는 분이 그 그릇을 쓸 일이라고는 가족들이 방문했을 때밖에 없겠지. 그러나 그 일이 할머니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던 것 같다.



그 모든 일을 마쳤을 때 나는 썰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갯벌에는 조그마한 게들이 수도 없이 늘어서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인간이 보기에는 고작 흙더미 주워섬기는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삶일 것이다.


한차례 썰물이 쓸어가며, 밀물이 밀려들며 게들이 이뤄놓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나는 어쩌면 파도를 닮은 끝에 썰물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주일 동안 할머니의 보물들을 끄집어냈고, 부서져 내린 흔적들을 닦아냈던 것이다.


가끔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를 찾아뵈면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것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할머니는 웃으신다. 남쪽 섬 자락의 바다처럼 한마디 말씀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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