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ne Doe May 16. 2022

멸망한 세계에 혼자 남겨져도 그럭저럭 살아갈 유형

내 MBTI 유형은 INFP다. 예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요즘 약간 눈치가 보인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유형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아마 나라도 썩 달갑지는 않을 것 같다. 꽃밭에 가 있는 사람 데리고 건설적인 일을 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게다가 지독하게 충동적인 내 성향이 누구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미안한 마음을 품고 사는 것도 못 할 일이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소안도 생활은 썩 훌륭한 점이 많았다. 거기서는 조금 덜 미안하게 살아도 괜찮았다.



그곳에는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장소가 하나 있다. ‘치끝’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어쩌면 ‘치끗’일 수도 있다. 방파제 끄트머리를 말하는 것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다. 사투리인지 외래어인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그곳을 그렇게 불러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기로 했다.


치끝은 길의 끝인 것 같기도 했다. 거기서부터 인적 없는 해변이 이어져 있었다. 자갈로 이뤄진 몽돌 해변이었다. 상상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곳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바다에서부터 온갖 부유물이 밀려들었다. 섬사람들이 쓰고 버린 잔해와 무언가를 불태운 흔적으로 가득했다. 딱 사람만 없었는데, 그래서 마치 멸망한 세계의 해변처럼 보였다.


자갈도 여느 몽돌해변처럼 예쁜 모양이 아니었다. 광택이 나지도 않고 저마다 뾰족하게 날이 서 있었다. 미끄러운데다가 흔들거리는 곳이 많아서 아주 위험천만했다. 걷다가 다치기에 그보다 좋은 곳은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여름이면 자갈 위로 수만 마리의 갯강구가 기어 나왔다. 그것들은 바퀴벌레보다 조금 더 다리가 많았다. 장관이라고 표현해도 좋을지 잘 모르겠다. 해변을 걸어가면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갯강구들이 길을 내주었다. 그들이 사각사각 걷는 소리가 해변을 가득 메웠다. 이때 나는 보통 브랜든 프레이저가 나왔던 ‘미이라’를 떠올리고는 했다. 거기에 나오는 식인 풍뎅이 무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다행히 겨울에는 갯강구의 세계를 위협하지 않아도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차가운 날에는 바람이 가벼웠다. 나도 함께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옷을 두툼하게 입고 있어도 넘어질 것 같지 않았다.


자갈을 밟으면 발소리가 해변 끄트머리까지 메아리쳤다. 파도가 끊임없이 철썩였지만, 내 귀에는 오직 발걸음 소리만 들렸다. 맑은 날에는 멀리 제주도가 보일 만큼 탁 트인 곳이었다. 그러나 메아리를 듣고 있으면 어쩐지 밀폐된 공간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소리가 내 안에서 울려 퍼졌다. 다른 시간 속을 걷는 것 같았다. 그 시간 속에는 그저 나 하나뿐이었다. 공명이라는 단어가 그걸 설명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단순히 다치지 않으려고 집중해서 걷느라 그랬을 수도 있다.


다른 해변으로 이어지는 중턱에 이르면 내 산책은 끝이었다. 거기에는 묘한 건물이 하나 있다. 삼각형 지붕을 가진, 딱 집이라는 단어에서 연상할 만한 건물이었다. 한 평이나 될까 싶을 만큼 작았는데,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좁아 보였다. 창고라 하기에도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붕도 내 키보다 조금 높았던 것 같다. 건물을 뒤덮은 이끼 때문에 초록색으로 보였다. 어릴 때는 거기에 마녀가 살 거라고 상상했다. 지금도 그렇다.



돌아가는 길에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함박눈을 보고 싶었다. 내린다면 아주 반가울 것 같았다. 코코아를 한 잔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드물게 깊은 잠을 자게 될 터였다. 이미 낮에 꿈을 모두 헤매고 와서 그런지 노곤했다. 해변에서 벗어나자 멀리 파란색 대문이 보였다.

이전 07화 우리는 저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존재하고 있어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