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하염없이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에 친구들이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의 말에 대답하거나 종종 이야기를 보태기도 했지만, 나는 한눈을 팔고 있었다. 장작 위에서 춤추는 불꽃이 너무 고혹적이고, 밝은 주황색이었다.
파주 글램핑장에서 보낸 5월 저녁은 혹독했다. 자고 나니 발에 경미한 동상이 생겼다. 덕분에 모닥불은 더없이 따스했다. 그건 너른 밤 자락을 힘겹게 걷어 비춰낸 나의 깊은 골방이었다. 어쩌면 J.K.롤링의 소설처럼 불길을 타고 어디론가 이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시간으로도 갈 수 있다면, 소안도에서 피웠던 화톳불로도 분명 길이 이어질 것이다.
떠났을 때처럼 나는 갑자기 돌아왔다. 본가는 이사해서 낯선 곳에 있었다. 1년 정도 다녔던 초등학교의 뒤편이었다. 근처에 어린이집도 있는 탓에 낮에는 아주 소란스러웠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비명과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구분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안정이라는 단어가 나를 떠난 것처럼 보였다. 서울은 새벽도 도회지 출신이라 그런지 소란스러웠다. 잠들만 하면 들리는 엔진소리와 드물게 울리는 경적에 비하면, 층간소음은 견딜만한 편이었다. 별이 보이지 않았고 해와 달은 무심했다. 그래서 나도 곧 무심해지게 되었다.
소안도를 나오게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시골집 마당 가운데에는 내가 여기저기서 모아온 돌멩이가 모여 있다. 주먹만 한 것부터 머리통만 한 것까지 다양했다. 화구를 만들려면 바닥에도 구멍을 파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돌들은 그저 둥그렇게 모여앉아 세월을 보냈다.
장작을 마련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창고 위 옥상에는 오래된 나무 팰릿이 있었다. 이 거대한 널빤지 구조물은 3m 정도 길이였고, 썩어가고 있었다. 위에 덮어둔 방수포조차 삭아서 부서져 내렸다. 방수포를 모두 걷어내자 안에 살고 있던 수십 마리의 바퀴벌레가 집을 잃고 흩어져갔다. 나는 7~80년대 깡패 용역처럼 도끼를 들고 그들의 집을 산산조각 냈다. 너무 잔혹했던지 자루가 썩어있던 도끼머리가 다섯 번이나 마당으로 날아가 파업을 선언했다.
처음으로 불을 피웠을 때는 한 여름이었다. 젖은 장작과 잡초를 태웠는데, 연기가 마당을 뒤덮어 난리가 났다. 밤이 아니었다면 분명 소방차가 출동했을 것이다. 일단 장작을 말릴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불을 가둘 구덩이도 필요했다.
창고에 거대한 망치가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멘트로 된 마당을 파내려면 그게 필요했을 것이다. 나는 끝내 화구를 완성하지 못했다. 대신 잔꾀가 생겨 커다란 독 뚜껑을 대신 쓰기로 했다. 그건 내 형편없는 미적 감각 덕분에 오랫동안 화장실 앞을 장식하고 있었다. 아마도 할아버지가 만들었을 오래된 나무 의자를 받침대로 삼았다. 나는 그게 옛 신전 입구를 밝히던 신성한 화로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장작은 반년도 넘게 말리는 동안 고양이들의 침대 역할을 병행했다. 도끼로 부숴 만들어서 뾰족한데도 고양이들은 이상하게 그 침대를 좋아했다. 덕분에 장작에서 구릿한 냄새가 진동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아내야지, 별수 없는 일이었다. 냄새랑 별개로 장작은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바비큐는 보통 통구이를 의미하지만, 숯불구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아쉬운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내 주식 중 하나였던 브라질 산 냉동 닭 다리 정육을 스테인리스 석쇠에 올렸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소고기 산적을 구워주시던 물건이었다. 화톳불에 구운 닭고기는 훌륭한 맛이 났다. 떠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했던 중요한 바비큐, 그게 내 소안도 생활의 마지막 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