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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Doe May 24. 2022

위리안치 圍籬安置

시골집에서는 동이 틀 무렵에 감자 삶는 냄새가 풍겨왔다. 옥상에 서서 그 냄새를 맡고는 했다. 파도치듯 바람이 불었고, 겨울이었다. 그럴 때 내가 생각했던 건 보통 고양이들이다. 어디서 그토록 길고 차가운 밤을 보냈을까. 그러나 그 시간에 고양이를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시선을 옮기면 삭막한 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한기에 풀죽은 잡초들이 노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열매를 거의 다 잃어버린 감나무, 옆으로는 시든 멍 넝쿨이 보였다. 나는 처음에 그걸 작은 탱자나무라고 생각했다. 여름 끝 가을로 접어들 무렵 넝쿨에 열매가 열렸다. 탁구공보다 조금 큰 암녹색 열매였다. 더 지나면 노랗게 익어갈 줄 알았는데, 기대와 조금 달랐다.


다시 겨울이 오기까지 소안도에 머물 생각은 아니었다. 3개월만 있다가 돌아갈 계획이었다. 가방 하나 캐리어 하나 달랑 들고 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무언가가 아쉬워서 부진부진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바다에 눈 내리는 것을 보고 싶었다.



소안도에는 명소라고 부를 만한 장소가 꽤 많았다. 특히 여름에 그곳을 둘러볼 일이 잦았다. 휴가로 찾아온 지인들 때문이었다. 그들과 함께 미라리 해수욕장에 갔고, 자연림을 구경했다. 해수욕장의 만은 안쪽으로 깊게 패어 있었다. 덕분에 양쪽 곶이 해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흑진주처럼 매끄러운 몽돌해변이 이 보석함 안에 담겨 있었다. 숨어있는 비경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예쁜 곳이었다.


비자리 항일 기념관에도 여러 번 갔다. 동학운동과 항일운동의 흔적이 보존되어 있는 곳이었다. 강점기에 일본이 세운 등대를 습격한 사건도 있었다. 동시에 3.1운동에 사용된 태극기를 만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때문에 월항리는 1년 내내 태극기를 게양했다. 섬에는 제각기 뭍사람들이 모르는 역사가 있다.


작은 섬이지만 학교도 있다. 운동장 주변으로 야자수가 자라고 있었다. 초록색 잔디밭과 노란색 스쿨버스를 구경했던 것이 기억난다. 방학이라 그런지 학생들이 없어서 아주 조용했다. 낚시꾼에게는 달가운 환경이었을 것이다. 섬이니만큼 발 닿는 대부분이 낚시터이기도 했다. 등등 관광 안내 페이지에 나올법한 장소 말고도 숨어있는 풍경이 여럿이었다.



그러나 내가 진심으로 좋아했던 장소는 대부분 길이었다. 사람이 없는 시골길과 거길 걷고 있는 동안 흥얼거렸던 노랫말들, 가끔 마주치는 고양이, 들꽃. 그리고 나는 눈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으로 설레던 시간이 참 좋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막상 눈이 왔을 때 꽤 당황했다는 점이다. 바다에 내리는 눈은 고요할 거라 생각했다. 잔잔한 바다 위로 떨어지는 하얀 꽃잎을 상상하고 있었다. 바람은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눈이 내린다기보다는 몰아쳐서 도저히 원하는 장면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실컷 얻어맞기만 하고, 씁쓸하게 걸음을 돌려야 했다. 한 해를 기다린 것치고는 허무한 결말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 해를 좋아한다. 가끔 생각날 때가 있다. 갑자기 탱자나무가 떠오른 것도 마찬가지다. 멍, 표준어로는 멀꿀이라고 부르는 넝쿨이었다. 가시도 없고, 나무처럼 보이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설익은 열매가 약간 비슷하게 생기기는 했다. 그래도 지금 와서 떠올려보면 착각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은 길에서 노래를 흥얼거리기 어렵다. 어디를 가든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건물마다 우두커니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여전히 눈을 기다리기는 하지만 예전 같지는 않다. 요즘에는 어쩌면 내가 이 커다란 도시 한 구석에 유배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다시 어디론가 떠날 때가 되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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