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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씨 Aug 23. 2024

INFP의 미니멀 희망사항

프롤로그




I : 내향형 집순이


어릴 학교에 다녀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나에게 EBS채널을 틀면 자주 나왔던 밥로스 아저씨와 김영만 만들기 아저씨는 나의 친구나 다름없었다. 다 마시고 난 우유팩이나 요구르트병을 모아서 만들기 아저씨를 따라 하다 보면 시간이 금세 흘러버리고는 했다. 밥로스 아저씨가 붓으로 물감을 터치할 때마다 변해가는 그림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는 했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려보고 싶은 것들을 보고 그리거나 기름종이 위에 베껴서 그려보기도 하고, 내가 원하는 그림을 형태로 잘 그려내지 못하니 여러 가지 도형들을 겹쳐 색깔을 칠해 보기도 했다. 마치 마음만은 추상화를 그리는 화가처럼.


고등학교 때는 서점에 가서 잡지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잡지에서도 나의 관심사는 인테리어였다. 아마도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던 나는 공간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다 잡지에서 새로 생긴 벽지 회사가 진행하는 이벤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홈페이지에 가입하면 무료로 모형집 전개도가 인쇄된 벽지 샘플들을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슈베르트의 집, 헤밍웨이의 집 등 유명한 건축물들의 전개도가 인쇄되어 있는 벽지를 자르고 붙여서 미니어처 모형집 만에 한동안 빠져있기도 했다. 그러다 진짜 집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 건축학과에 진학하고 싶은 꿈도 잠시 꾸었다.


바깥에 나가서 친구 만나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내가 만났을 때 편하고 기분 좋아지는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 선택적 만남을 선호하는 편이다. 사람을 만나고 오면 반드시 나만의 시간이 필요한데 집은 그런 나에게 에너지 충전소 같은 곳이다. 의도치 않게 불편한 만남을 갖고 집에 돌아오면 그날은 에너지를 다 소진해서 충전하는데 며칠이 걸리고는 한다. 약속이 있는 날 약속이 취소되면 오히려 좋아하기도 하는 나는 내향형 집순이다.



N: 생각하기 좋아하는 몽상가


불안한 일이 일어날 것 같으면 나는 생각한다. 그 일의 최악의 상황까지 상상한 다음 '이것보다 더 심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야.'라며 나를 위안한다. 엄마가 아빠와 싸우고 집에 돌아오지 않았을 때에도, 거리를 뛰어다니며 엄마를 찾아다닐 때에도, 태풍으로 밤새 흔들리는 창문들이 무섭게 나를 몰아세울 때에도, 홀로 집에 남아 어둠을 이겨내고 아침을 맞이할 때에도 나는 늘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며 나를 위안했다.


이따금 머릿속 나의 생각들이 너무 많아지면 과부하가 온다. 생각들이 엉키고 설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치 생각에 잠식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몸에도 이상반응이 온다. 머리가 아프거나 소화가 잘 안 되거나 배에 가스가 차서 이유 없이 아랫배가 아프기도 했다.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당하는 것 같기도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몇 년 전 미니멀라이프에 대한 관심을 갖고 조금씩 나의 생활과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더니 생각도 정리되기 시작했다. 도서관에 영역별로 잘 분류되어 정리된 책들처럼 물건들이 정리됨에 따라 생각도 정리가 되었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고 잘 정리해서 소화시키느냐가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생각들을 잘 표현하고 정리하려면 일단 잡동사니들부터 머릿속에서 비워내야 했다. 머릿속 잡동사니들은 나의 일상생활 속 물건들과 일치했다. 언젠가 필요할 것 같아서 사두고 꺼내어 쓰지도 않는 물건들, 다른 사람들도 다 하나씩 갖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산 물건들, 소확행이라며 기분전환용으로 충동구매한 물건들, 색깔별로 쟁여놓은 똑같은 물건들 등등. 이런 물건들을 비워내면서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하고 불안해했던 내가 불필요한 생각들을 걷어내고 인생에서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들을 잘 정리하고 분류해 낼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이다.



F:  '감정해소'가 중요한 감정적 인간


'감정해소'가 먼저인 나는 문제상황이 발생했을 때 상대방이 내 감정을 먼저 알아주기를 바라는 사람이었다. 나와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나를 잘 알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혼자 서운해하기도 상처받기도 했다.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쳇! 내 마음도 몰라주고!'라는 생각을 속으로 자주 하고는 했다. 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보다 상대가 나의 감정을 얼마나 잘 알아주느냐가 중요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을 잘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감정해소'보다 '문제해결'을 더 중시하는 사람을 우리는 T형 인간이라 부른다. 이성적 사고를 하는 T형들은 문제 상황을 마주하면 그 문제의 발생 원인을 해결하면 상황은 종료된다는 생각을 하고 문제를 바라본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미묘하다. 마치 기계처럼 '상황종료. 문제 해결 끝!'이었으면 좋겠지만 우리에게는 감정이라는 아주 까다로운 녀석이 남아있다. 이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인간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한다. 나는 마치 감정의 노예와도 같았다. 파도치는 감정 속에서 어찌할 줄 모르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망나니처럼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분명한 건 감정은 내가 바라봐주고 알아봐 주고 잘 느껴주면 흘려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감정을 바라봐주고 알아주어야 하는 사람은 부모도 아니고 배우자도 아니고 자식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어야 다. 스스로 감정을 잘 바라봐주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해서는 주변환경이 정리되어야 한다. 불필요한 것들을 바라보고 치우며 나의 에너지를 쏟지 않을 수 있도록.


'감정해소'가 중요한 감정형 인간인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그런 사람인지 스스로 알아차린 후부터는 상대방이 나의 감정을 알아주고 알아주지 못하고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니멀라이프적 사고가 나에게 가져다준 커다란 변화였다.



P: 계획하기보단 즉흥적인 게 좋아


몇 번의 MBTI검사를 해도 마지막은 알파벳은 변함없는 P였다. 결혼 전에는 계획되지 않은 일들을 하는 것을 좋아하고 즐겼다. 학교 다닐 때에는 계획된 시간표 속에 얽매여 있다가 즉흥적으로 무엇인가를 할 때 해방감을 느끼는 기분이었다. 여행을 할 때에도 중요한 목적지와 숙소정도만 잡아두고 나머지는 그날그날의 기분과 컨디션에 따라 스케줄을 정해서 하는 자유여행을 즐겨한다. 획에 없던 일이 생겨도 큰 타격감이 없다. 다른 걸 하면 되니까. 아무리 맛있고 유명한 밥집이라도 몇 시간씩 줄 서서 먹는 것보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밥집을 찾아가는 것을 좋아한다. 어쩌면 나는 계획적인 사고 자체에 압박감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그 누구보다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틀 안에서 안정감이 들면서도 그 속에 있으면 벗어나고 싶은 답답함이 느껴졌다.


이 모순적인 감정은 내가 미니멀라이프에 관심을 갖고 주변정리를 하게 되면서 해소되었다. 나는 사실 목표와 갈망을 혼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목표하는 일이 있다면 계획을 세우고 그것에 맞게 해 나가면 된다. 그러나 그 계획 속에서 하기 싫은 일이 생기거나 지키지 못하는 것들이 생겨나면 즉흥적인 성향을 핑계로 변명하며 합리화시켰다. 그렇게 합리화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목표가 아니라 갈망이 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다이어트를 목표했는데 오늘은 기분이 별로라며 폭식을 했다. 즉흥적이라는 성향을 핑계로 갈망과 목표를 혼동한 것이다.


미니멀라이프를 지향하면서 나에게 생긴 큰 변화중 하나는 나에 대해서 몰랐던 것들에 대한 '인지'였다. 그냥 성격이 그러려니 혹은 타고난 성향이 이런 거야 라며 나에 대해서 잘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물건을 정리하고 생활환경이 심플해지면서 나에게 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인지하게 된 것이다.



미니멀 희망사항


나는 미니멀리스트가 아니다. 그저 미니멀라이프를 희망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미니멀라이프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후로 미니멀리스트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상이나 책을 접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와 나는 이렇게까지 못할 것 같다.'였다. 주 손이 가는 무채색의 옷 몇 벌만 남겨두고 다른 예쁜 옷들을 정리할 용기도 나지 않고, 하늘아래 같은 색조는 없다는 신념으로 고이고이 모아 온 나의 화장품들을 비워낼 용기도 나지 않았다. 다만 내 눈에 보이는 나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물건들부터 정리하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거실, 부엌, 냉장고, 옷방, 화장대, 다용도실안의 물건들을 정리하고 비워내면서 나는 그 물건들 속에서 혼란스럽고 복잡한 내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렇게 나를 바라봐주고 인정해 주니 비움이 가능해졌다. 집안의 모든 물건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고 그 자리에서 여유롭게 숨을 쉴 수 있게 되자, 나 자신도 여유를 찾아나가며 나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미니멀 라이프를 생각하면 자꾸만 떠오르는 노래가사가 있다. 변진섭의 '희망사항'이라는 곡이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밥을 많이 먹어도 배 안 나오는 여자
내 얘기가 재미없어도 웃어주는 여자
난 그런 여자가 좋더라
머리에 무스를 바르지 않아도 윤기가 흐르는 여자
내 고요한 눈빛을 보면서 시력을 맞추는 여자
김치볶음밥을 잘 만드는 여자
웃을 때 목젖이 보이는 여자
내가 돈이 없을 때에도 마음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여자


가사를 보면 보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희망사항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런 여자가 실존하느냐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이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에게 미니멀라이프는 노래가사 속 희망사항처럼 나의 삶 속에 보편적으로 흩어져 있지만 조금은 까다롭고 이게 가능할까 싶기도 한 희망사항들처럼 마음에 담아두고 하나씩 실천해나가고 싶은 그런 라이프 스타일이다. 노래 가사의 마지막에 여자가 이렇게 말한다.


그런 여자한테 너무 잘 어울리는
그런 남자가 좋더라.


팩폭이다. 미니멀라이프를 추구하는 삶을 살다 보면 희망사항에 어울리는 멋진 여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미니멀라이프적 사고가 나라는 사람에게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감정적인 부분, 생각적인 부분,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부분까지. 거창한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고 있지는 않지만 희망사항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내 삶의 곳곳에 미니멀라이프가 미친 향을 관찰하고 기록해보려 한다.












메인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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