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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한 래몽 Aug 06. 2023

반에서 꼴뜽하던 내가 영문과를
갈 수 있었던 이유

REMONG 1 - 프리하게 살고싶어서

영문과를 편입하게 된 건, 어렸을 때부터의 나의 간절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뭐 하나 잘하는 것 없었던 것 나에게 한줄기 빛처럼 나타난 건 그나마 '영어'를 배우는 호기김이었다. 

영어 교육 첫 만남은 7살 눈높이라는 학습지에서부터 시작됐다. 테이프를 듣던 시절, 오디오에 나오는 문장을 따라서 말하는 방식이었다. 마침 MBTI의 N의 성향을 가진 나에게 적합한 교육법이었는지 상당히 흥미를 느꼈다. 



초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영어에 대한 자신감만큼은 충만했지만, 중학교를 입하고 180도로 바뀌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사이에는 커다란 산이 존재했으며, 누군가는 어려움 없이 따라가는 학생이 있는 반면에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적응하지 못한 학생으로 나뉘었다.

여기서 안타깝게도 나는 후자에 속한다. 처음 접해보는 문법, 주어, 서술어 등 분명 한국어인데 우리나라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하염없이 시험 성적만큼 자신감도 내려갔다.



사진: Unsplash의Annie Spratt




그리고 인생 처음으로 반에서 꼴찌를 했다. 워낙 천성이 느린 탓에 일찍부터 엄마의 걱정을 샀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말을 하지 않아서 무슨 일이 났을까 싶어 어린 나를 안고 소아과를 찾아갔지만 '또래에 비해 느린 편이네요'라는 찝찝한 답을 듣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때부터 가족들에게도 '느린 아이'라는 프레임이 써졌으며, 스스로도 어느 순간 인정하게 됐다.

그래서 그런지 중학교 때도 학습을 전혀 따라가지 못해서, 하교 후 보충수업까지 하게 됐다. 처음 겪는 딸의 학습 부진의 모습에 충격을 받으신 엄마는 야간으로 국밥집에서 일하며, 영어 과외를 시켜주셨다.


사진: Unsplash의Angelina Litvin


토요일마다 60분 선생님 집에 방문하는 조건으로 10만 원의 과외였다. 3년간 선생님께 1:1 과외를 받은 사교육 덕분일까 드디어 느린 아이가 결승전에 도달하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내용은 반에서 꼴등 했던 사람이 상위권 된 드라마틱한 서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드라마였다면 어려운 가정형편을 극복하고, 고등학교에서도 상위권을 유지 후에 외대를 진학해서 장학금을 타는 그럴듯한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호락하락하지 않았다. 그 후에 고등학교 진학하고 다시 중하위권에 머물게 됐고, 지방 전문대에 영어와 전혀 다른 과를 진학하는 결말을 맞는다. 나의 지독한 영어의 짝사랑은 계속됐지만 한계에 계속 부딪혔다. 그래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하고 싶은지 알게 된 순간이었다. 



내 안의 불빛이 하나 켜졌다



사진: Unsplash의Dallas Reedy




나에게 박혀있던 고정관념의 틀 안에 '느리다=나는 못할 것이다'가 장착되어 있었기에 시도하기도 전에 '할 수 없다'라는 벽이 생기곤 했었다. 시작하기도 전에 도망가는 핑계를 만든 것이다.
처음으로 자신감을 일깨워준 '영어'는 회사생활에 몸도 마음도 지쳤을 때 구원처럼 다시 찾아왔다.
같이 일하던 교직원분이 바쁜 업무에도 대학원 강의를 듣는 열정을 보면서 잊고 있었던 꿈이 생각났다.


영어를 더 배우고 싶었지만, '나는 어차피 하지 못해'라며 영문과를 입학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했었다.
영문과를 입합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회사에서 퇴직을 앞둔 나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방송통신대학교 영문과에 편입 신청을 했다.


사진: Unsplash의Clemens van Lay



그 후에 동경했던 삶에 가까워진 나는 실제로 경험해 보니 좋아하는 것을 잘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직접 경험해 보니, '영문도 모르고 영문과에 입학한 꼴이었다' 편입은 3, 4학년의 과정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1, 2학년의 기초도 없었던 나는 심화과정을 갑자기 배우게 됐고, 당연히 과락을 면하지 못했다. 



편입해서 2년이면 졸업할 수 있는 학과를 턱걸이로 5년이나 걸렸다. 그렇게 외로운 영어의 짝사랑은 끝이 났다. 그래도 영문과를 졸업한 덕분에, 과외와 학원 아르바이트를 통해 수입을 벌 수 있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5년 동안의 결실을 통해 후회 없이 영어를 사랑했다.



사진: Unsplash의Jukan Tateisi




영문과를 졸업한 것은 내 안의 작은 성공의 시작이었다. 스스로 정한 꼬리표를 끊고 '나는 하지 못한다'는 법칙을 깨버린 첫걸음 말이다. 반에서 꼴찌하고 지방 전문대를 졸업해서 겨우 영문과를 편입했지만 졸업까지 5년이나 걸린 스토리는 일반인의 평범한 작은 성공을 경험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후 나는 '저 사람도 했는데 나라고 왜 못해? 나도 충분히 할 수 있어!'라는 마인드를 가질 수 있게 됐으며, 새로운 일에도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우리는 타인이나 사회가 정해준 기준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배운다. 학교를 졸업하면 그럴듯한 4년제를 졸업하고 바로 취직해서 직장생활을 하는 것인 어느 순간 '평범'의 기준이 됐다. 


나 역시 그랬다. 사회가 정해준 '틀'을 벗어나면 아웃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4년제가 아닌 전문대를 졸업하고, 하고 싶었던 꿈을 위해 영문과에 편입하고 지금은 전혀 다른 일을 해도 세상은 평온하게 흘러가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실행이 어려운 이유는 당연한 것이다. 우리의 뇌는 익숙한 것에 적응하도록 시스템화되어있다.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면 본능적으로 벗어가길 원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성공이 아니다. 한 번의 '작은 성공'이다. 하고 싶었던 일, 꿈을 찾는 여정을 위한 '작은 용기'만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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