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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한 래몽 Aug 12. 2023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건 뭐든 할 수 있다는 것

REMONG 1 - 프리하게 살고 싶어서

회사를 퇴사하고 가장 좋았던 것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비난할 사람도 없고, 하고 싶은 것을 해도 주변에서 이런저런 간섭도 없는 생활 말이다.



대학교 행정조교로 일했을 때 일이다. 점심시간마다 이사님의 전화를 받아야 하는 말도 안 되는 규칙 때문에 여자 직원들은 남아서 점심을 먹곤 했다. 그때 같이 일했던 총무팀 상사분은 패션에 관심이 많았는데, 가끔 새로운 옷을 입고 오면 화장실로 부른 다음에 자신이 잠깐 입어본다고 하며 사진을 찍어달라며 부탁했다.



처음 겪는 부탁에 당황했었지만 상사의 부탁이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 외에는 잘 챙겨줬던 상사분이라 '왜 내가 이런 부탁을 들어줘야 하지?'라는 의문은 있었지만 어떨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사진: Unsplash의Priscilla Du Preez


하기 싫은 일도 상사가 부탁하면 해야 한다는 것과 의문을 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처음 행정조교라는 업무에 적당한 옷이 뭔지 몰랐기에 정장을 입고 출근했다. 당시 교직원들도 정장을 입고 있었기에 당연히 그렇게 입고 출근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들리는 소리는 "쟤는 무슨 정직원이 된 줄아나 봐?"였다. 입사하고 제대로 된 인수인계를 받지 않아, 전혀 모르는 업무를 맡았을 때 다른 부서에 질문했더니 사무실이 떠나갈 정도로 "그걸 네가 알아야지! 내가 어떻게 알아?!"라는 말이었다.



퇴근하고 한 참을 엄마가 사준 정장에 닭똥 같은 눈물로 적셨다. 인수인계할 때 알려주는 내용을 메모장에 가득 적었지지만, 퇴사한 자는 말이 없었다. 온통 새로운 일의 연속이었고 누구 하나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 학력도 좋고 뛰어난 업무능력을 가진 정직원 사원들에 반해 갓 전문대를 졸업하고 엑셀조자 잘 다루지 못하는 나는 물어뜯기 좋은 먹잇감에 불구했다.



사진: Unsplash의Alex Boyd


그 후 회사에서 욕먹기 싫어서 필사적으로 인수인계 자료를 만들었다. 내가 맡은 업무는 학교 시설관리 업무로 학교의 공과금을 처리하는 업무였다. 매 달 고정적으로 나가는 학교의 시설 관리비를 체크해서 정리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포토샵과 일러스트를 다룰 줄 알아서 디자인 관련 업무는 원래 내 일이 아니었지만 많은 부서에 불려 다녔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다른 행정조교도 포토샵 자격증이 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시설관리 업무는 교내 관련 문제로 전화가 계속 울리는 곳이라서 불안해서 자리를 비우지 못하는 반면 다른 팀 조교들은 쉬는 시간을 갖기 위해 카페에 갔다 오면서도 같은 월급을 받았다.



필요한 곳이 있으면 매일 불려 갔으며, 자리 이탈하지 않고 아무리 열심히 했지만 회사는 알아주지 않는다.

계약직의 기간이 연장되지도, 연봉이 올라가지 않는다. 똑같은 업무시간 남들보다 열심히 하면 그냥 열심히만 하는 사람이 된다.



사진: Unsplash의Clay Banks


내 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면? 내 가치는 스스로 정하면 된다. 그때 처음으로 회사라는 곳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봐도 나의 앞날은 깜깜했다. 지방 전문대를 나왔고, 그럴듯한 이력도 없고 자격증도 없는데 다음 회사에서 월급을 100만 원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그전에 받아줄 곳은 있을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건 뭐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처음 시작한 것은 그나마 특기였던 외국어 능력을 활용하는 것으로 일본어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었다. 학교 다닐 때 그렇게 하기 싫었던 공부를 궁지에 몰리니깐 하기 시작했다.



사진: Unsplash의Sofia Sforza



그리고 일본어 자격증을 합격의 행복감을 만끽하기도 전에 퇴사 후 허리디스크로 제대로 서있지도 못했다.

6개월 가까이 재활을 통해 겨우 건강을 회복하자마자 선택한 것은 해외여행이었다. 90만 원 월급에서 매달 40만 원씩 적금을 들어 2년 채 되지 않아 800만 원의 적금을 깼다. 그리고 일할 때 그렇게 부러워했던 친구들의 어학연수를 떠올리며 일본으로 떠났다.  



처음 경험한 해외여행은 큰 충격이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오는 호기심과 자유가 주는 행복감은 그동안 고생에 대한 달콤한 위로 같았다. 짧은 2박 3일의 여행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앞으로 의문을 품은 일을 속으로 삼키고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고,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은 곳에 다시 돌아가지 않기로 말이다.



부모님 이혼, 한부모가정, 압류 딱지, 지방 전문대, 계약직의 #(해시태그)는 20대까지 나를 표현하는 수식어였다. 하지만 앞으로의 해시태그는 내가 정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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