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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한 래몽 Jul 30. 2023

세 번의 독립 | 지독한 성장통

REMONG 1 - 프리하게 살고싶어서

REMONG 1 - 프리하게 살고싶어서

대학교에 재학 시절 같은 동기지만 2살 많은 언니가 있었다. 마침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기에 대학생활을 같이 보냈었다. 같은 조별 과제를 할 때 지긋이 보더니 말을 건넸다.



'너는 온실 속의 화초 같다'




언니가 보기엔 세상 물정 모르는 후배의 미래가 걱정이 됐나 보다. 그 이후 나의 별명은 성과 함께 조온화로 불렀었다. 그도 그럴 듯이 타인의 시선이 낯설지 않다. 또래보다 작은 키, 어려 보이는 목소리도 한 몫했을지 모른다.


사진: Unsplash의www.zanda. photography



거기다 과보호에 가까울 정도로 엄마의 통제 아래 '해가 떨어지면 집에 귀가해'라는 말을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들었다. 전문대를 졸업한 덕분에 빠른 사회생활을 했지만 여전히 통금이 있었고 24살이 돼서야 처음으로 친구들이랑 1박 2일로 여행 갈 수 있었다.

엄마가 결혼하고 나를 낳은 나이 24살에 조금이나마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사진: Unsplash의Claudia Soraya


중학교 3학년 때 우리 집에는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아빠의 사업 문제로 그랬는지 매번 밤마다 아빠를 찾는 사람들이 문을 두드렸다. 동생과 나는 매일 저녁 불을 끄고 숨직인 채 없는 척을 해야만 했다.

경찰에게 신고한 적도 있고, 한 번은 어떻게든 해결해 보기 위해 문을 열었다가 술 취한 사람들이 강제로 거실에 들어온 적도 있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서 집에 빨간딱지가 여기저기 붙여졌다. 



처음으로 신축 아파트에 살아서 좋아했던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에서 최악의 결말을 맞이했다.

그것이 나의 첫 독립이었다. 부모님이란 울타리에서 강제로 나오게 됐다.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앞으로의 인생이 남들과 달라지겠구나를 본능적으로 알게 됐다.



사진: Unsplash의Claudia Soraya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하고 필사적으로 돈을 모았다. 500만 원이 모이자마자 오피스텔을 구해서 도피하는 듯이 나왔다. 그동안 원치 않았지만 K-장녀로 살면서 엄마의 보호자가 됐고 동생을 돌봐야 하는 의무감에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남은 우리는 각자의 삶을 찾아 떠나게 됐다.



유일하게 안식을 줬던 반려견도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처음으로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겪게 됐다. 강의를 들어가지 전 차 안에서 매번 울었다. 수업을 하면 또 아이들 앞에서는 웃어야 했기에 감정을 돌볼 시간은 없었다. 

K-장녀를 벗어나기 위해 도망 나온 대가는 큰 상실감이었다. 혼자 잘 살려고 가족을 버리고 뛰쳐나온 것 같았다. 


마치 불행이라는 선글라스를 영원히 벗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결국 '난 행복하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판단하며 나 자신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우울증이란 사실을 주변에 알렸을 때 하나같이 바깥을 나가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힘을 내라는 말들이었다.





당연한 대답인 것은 알지만, 그렇게 할 수 없음에 매 순간 나락으로 끊임없이 가라앉는다. 더 이상 힘이 나지 않는다. 두 전째 독립은 지독한 성장통과 같았다. 성장기에 겪는 물리적인 고통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지속되는 통증처럼 말이다.



그때 나의 성장통을 끝내 준 것은 친한 동생의 한마디였다. "언니 더 이상 힘내라고 못하겠다. 그동안 힘내왔잖아"인정이었다. 그동안 잘 노력해 왔다고, '더 힘을 내!'가 아닌 '힘내지 마'라는 말에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마지막의 독립은 '나=자신'이었다.



그 시절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회사를 다닐 때도 누군가의 기대에 보답해야 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 다녔다. 과거의 상처들도 극복하기 힘든데 '힘내야 한다'라고 자기 암시를 걸었다. 하지만 우린 AI처럼 단순한 명령어만으로 손바닥 뒤집듯이 감정을 컨트롤할 없다. 힘들면 힘들다고 인정하고, 슬픔을 이겨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나는 세 번의 독립에서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고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었다. 

 


사진: Unsplash의Volkan Olmez




프리랜서가 되면서 가장 좋은 점은 자신의 가치를 알게 된 것이다. 내 성격은 프리한 삶을 선택하기 전과 후로 나눌 정도로 성격도 180도로 바뀌었다. 타인의 기준이 잣대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자 커리어는 알아서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법과 소중히 여기는 방법을 배웠다. 독립의 끝에 따라오는 성장통은 지독하게도 아팠지만 그만큼 클 수 있었다. 참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랑 얽혀있던 사회를 벗어나자 오롯이 내 두 발로 설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만약 누군가 끝나지 않은 힘든 시간을 버티고 있다면 그것은 앞으로 있을 어떤 독립을 맞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지금도 충분히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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