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을 사랑하는 방식

by 술술

“언니, 부탁한 거 언제쯤 마무리될 것 같아?”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는 하던 작업을 멈춘다. 잠시 고민한 후에 내일 오후 3~4시 정도쯤이면 될 것 같다고 답한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일정에 무리가 없는지 확인하고 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나는 오랜만에 ‘일’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 집안‘일’, 취미로 하는 ‘일’ 매일 매일 크고 작은 일을 하지만, 돈을 버는 ‘일’은 몇 년 만인 것 같다. 얼마 전 친한 동생이 문서 작업 일을 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일회성이고 금액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신랑도 지금 일을 쉬고 있으므로 나로서는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pdf, 한글, 파워포인트를 연다. 회사를 그만두고 쓸 일이 없었는데 기분이 묘하다. 단축키를 쓰면 편한데, 단축키가 생각나지 않는다. 이럴 때 쓰는 기능이 분명 있었는데, 뭐였더라. 괜히 하겠다고 한 걸까. 게다가 이번 주는 미리 잡아둔 일정들도 많다. 기한까지 다 할 수 있을까. 약속을 다 취소할까.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아니다. 일단 머리를 식힐 겸 산책을 나선다. 예전의 나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맡은 일을 다 하지도 않고, 휴식시간을 갖는다고? 제정신인가 지금!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나 자신을 끝으로 몰았었다. 학생일 때는 시험 기간에 밤을 새워 공부했고, 수업시간에는 수업 내용을 한 글자도 빼지 않고 적고 들어야 개운했다. 회사 다닐 때도 밤새워 일했다. 생각해보면 일을 한다기보다, 일을 놓아주지 않았던 것 같다. 일의 진행 여부와 상관없이 일을 붙잡고 있어야 마음이 편했던 거다. 마치, 아이들의 애착이불이나 애착 인형처럼. 뭐라도 하고 있다는 자기 합리화. 그리고 이때의 나는 무척 예민하다. 아니, 실제보다 더 예민한 척을 했다. 왠지 웃고 있으면 내가 일을 안 하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내가 일을 대충 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다. 적이 나타나면 한껏 몸을 부풀리는 동물들처럼 나는 예민함을 과장했다. 학생 때 성적도 나쁘지 않았고, 회사에서도 업무 평가가 나쁘지 않았다. 결과가 나쁘지 않으니, 마치 내가 해온 것들이 바르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나중에는 징크스처럼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일들 같았다.


결혼 후, 잠깐이지만 다시 일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이전의 나보다 강박감이 더 심했다. 다시 하게 된 일이라 더 잘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거다. 게다가 회사에서는 나를 중간 관리자 직급을 주었기 때문에 책임감이 더 컸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했고, 남들보다 늦게 퇴근했다. 집에 와서도 주말에도 계속 업무 연락을 받고, 일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까. 신랑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망가져 가고 있는 것 같다고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며 회사를 그만두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작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홀했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그 사람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나는 며칠 뒤 회사에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다시 백수로 돌아왔다. 돈을 버는 ‘일’ 말고 집안‘일’과 취미로 하는 ‘일’이 내 일이 되었다.

사랑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사람마다 다르고, 같은 사람이라도 변하기도 한다. 예전의 나는 일과 나 자신을 분리하지 못했다. 일이 잘되면 내가 괜찮은 사람인 거고, 일이 잘 안되면 쓸모없는 사람인 거다. 그래서 일을 놔줄 수가 없었다. 옆에서 계속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신랑을 만나며 새로운 사랑도 있을 수 있음을 배웠다. 신랑은 야근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집으로 회사 일을 끌고 오지 않았다. 집에 와서는 나와의 시간에 충실했다. 같이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대화를 나눴다. 그렇다고 회사 일에 게을리했던 것은 아니다. 늘 일찍 출근했고, 업무 시간에 집중해서 자신이 맡은 일은 프로페셔널하게 해냈다. 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신랑은 일이 잘 안된다고 해서 자신이 못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이 잘 안 풀리면 자신을 탓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고, 대신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일에 대한 사랑 못지않게 자신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았다.

신랑을 보며 일을 사랑하는 방식은, 삶을 사랑하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물이나 사람을 볼 때, 너무 가까이 있으면 오히려 잘 보이지 않는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볼 수 있다. 거리를 두면 제대로 볼 수 있고, 거리를 둔 만큼 빈틈이 생긴다. 그 빈틈으로 바람도 공기도 햇빛도 드나들 수 있다. 사랑할수록, 오래 하고 싶을수록 가까이하고 싶고 계속 옆에 두고 싶어질 거다. 하지만 사랑할수록 그 마음을 가장 조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쉬었으니, 이제 다시 일을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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