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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day Jan 16. 2022

신라 고찰 무등산 증심사와 문빈정사

빛고을 광주 무등산에서 오래 묵은 인연을 만난다!


  증심사 오르는 길 초입 왼쪽에 문빈정사가 있다. 

예부터 절터에 조그만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사찰이지만, 정식 창건은 1959년이다. 

올라갈 땐 그냥 지나쳤다가, 내려오는 길에 외곽이나마  둘러보았는데, 뜻밖에 귀중한 문화재를 간직한 역사적인 사찰이어서 놀랐다.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증심사 유명세로, 나 같은 문외한에겐 슬쩍 지나치고 마는 곳이 될지도 모르겠다. 



  문빈정사는 불교운동과 민족민주운동의 산실이다. 

지석 스님이 1980년대와 90년대 민족민주운동과 종단 개혁에 앞장섰던 곳이다. 

이곳에서 창립된 무등 민족 문화회와 문빈정사 청년회, 신도회는 민주화와 불교 자주화에 이바지했다.

특히 김철수, 이기홍, 문익환, 김지하 등 민주인사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강연이나 담론을 했던 유명한 곳이다.


사진출처: https://bit.ly/3A0ezdC - 문빈정사 경내 풍경


사진출처: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https://bit.ly/3A0ezdC - 광주 문빈정사 조장 전적


  문빈정사에는 11종 12 책이 소장되어있는데, 모두 희귀본이다. 

임진왜란 전, 판본으로 간행 연도에 대한 기록도 정확하고, 판각 후 바로 찍어낸 초간본 '법계성범수륙승회수재의궤'는 불교 야회 법회 의식 중 하나인 수륙재 행사 정리 책이며, '천지명양수륙재찬요' 등 귀중한 판본도 있다. 보조국사의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1579), '조선 후기 감로도'(아귀의 세계를 묘사한 불화) 등도 보관되어 있다. 





  증심사로 향하는 길, 증심교를 지난다. 

증심사는 860년 철감선사 도윤이 창건한 통일신라시대 사찰이다. 

1094년(선종 11) 혜조 국사가 중수, 1443년(세종 25) 전라도 관찰사 금방이 자신의 녹봉으로 중창했다 전한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1609년(광해군 1) 석경 등 선사들이 중창했다. 

일제 강점 초기에는 임제종(臨濟宗) 운동 본부였다.

1951년 50여 명 무장공비들에 의하여 오백전을 제외한 대부분 건물이 아쉽게도 불타, 1971년 다시 증축, 오늘에 이른다. 증심사 대웅전과 지장전 등 대부분 전각은 최근에 지어진 것이고, 오백전(나한전)은 조선 초기 건물이다. 




http://www.jeungsimsa.org/g5/



사진출처: 무등산 증심사 홈피, 가람배치


증심사의 가람배치는 계곡의 방향을 따라 동↔서의 축 선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기울어진 지형을 몇 개의 큰 단으로 나누어 건축물을 조화롭게 배치했다. 이는 산지 가람의 배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증심사 일주문


사천왕문


대웅전 전경


  대웅전에 이르는 계단 왼편, 80년대에 지어진 종각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증심사 오층 석탑과, 칠층 석탑이 있고, 곁으로 지장전도 보인다.



  계단을 올라 가까이 다가설수록 대웅전의 단아한 광경은 증심사의 평화롭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모두 다 품어 안고 있는 형상으로 보인다. 

그 편안한 분위기가 이곳을 찾는 모든 중생의 몸과 마음을 이완시켜준다.  



대웅전 우측에는 지장전


  증심사 지장보살과 염라대왕 등 10 왕을 모신 전각이다.
사진에서 보면 대웅전 오른쪽에 보이는 건축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정면 왼쪽에는 회심당, 중앙에는 지장전의 편액이 걸려 있다.

*편액은 종이, 비단, 널빤지 따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방 안이나 문 위에 걸어 놓는 액자.
지장전 건물은 원형의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웠으며 정면 5칸에는 칸마다 2분합문인 2짝의 여닫이 덧문이 각각 달려있다. 
내부에는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 판관, 녹사, 동자 등 명부중의 상과, 지장탱 및 4폭의 시왕탱을 봉안하였고 측면에는 여러 가지 형벌도가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다. 
이곳은 어두운 세계인 명부 세계의 왕인 염라대왕을 모신다 하여 명부전으로 불리거나 지옥에서 죄의 경중을 정하는 열 분의 왕을 모신 곳이라 하여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네이버 지식백과] 증심사 지장전 (광주광역시 - 두산백과 두피디아)


고려시대 석조보살입상  높이 2.05cm. 광주 유형문화재 제14호.   


증심사 대웅전 뒤쪽으로 나란히 서있는 2개의 석탑 



  고려 초기 석탑인 ‘증심사 오층 석탑’ 

조선 중기의 것으로 보이는 ‘증심사 칠층 석탑’이 지장전 위쪽에 우뚝 서있다. 

오백전 앞, 삼층석탑에서 오른쪽으로 좀 더 떨어진 곳으로 대웅전 옆 뒤쪽이기도 하다.

시대를 달리하는 두 개의 석탑이 나란히 서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서로 함께 의지하고 지탱해온 긴 세월이 우리네 삶의 끈끈한 인연과 다르지 않다. 

두 석탑 뒤쪽으론 푸른 이끼가 함께 공생하고 있다. 

생명을 품고 있는 모습이 살아 숨 쉬는 석탑으로 그대로 느껴지기도 한다. 

오랜 묵은 인연으로 잠시 우릴 멈추어 서게 하니, 숙연해진다.


오백전과 삼층석탑


  대웅전 뒤로 계단 몇 개를 오르면 통일신라 시대의 증심사 3층 석탑이 있다. 

탑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 오백전이 있고 탑 왼쪽으로 아담한 비로전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다.  

오백전 오른쪽으로 석불과 탑이 나란히 놓여 있다.

오백전은 무등산에 남아 있는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조선 초기(세종 25년) 건물이다.

광주 유형문화재 제13호 오백전과 증심사 창건 때 만들었다는 유형문화재 제1호 삼층 석탑에 눈부신 무등산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다. 


증심사 비로전


사진출처: 네이버 두산백과

  비로전 주불인 보물 제131호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신라시대 대표적 철불이다.

보물 제131호. 높이 90cm.


  인류사에서 철이 가진 역할과 가치는 특별하다.
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가장 널리 사용해온 금속이기도 하다.
철의 강한 성질은 개척과 정복이라는 인류 욕망을
실현시켰고, 역사의 전환기를 이끌었다.

  철의 강한 성질은 다양하고 실용적으로 사용한 인류 문화역사와 닿아있고 철을 제대로 사용한 민족이 세계를 지배하기도 했다. 서기 전 10세기~9세기 서아시아 철심이 든 청동검이나 페르시아 큰 칼과 다마스쿠스 검을 보고 경탄했다면, 철로 만들어진 불상을 만나면 위로를 받게 된다.  

철이 인류사에 자리매김하는 과정에서 우리 신라시대 대표적 철불좌상의 모습은 온화하고 따스하기만 하다. 차갑고 냉혈한 느낌 드는 철제 무기를 역사책과 박물관에서 보아왔던 기억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빛고을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서 만나는 철로 지어진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의 인자한 모습은 세상을 이중적 잣대로 바라보던 차가운 생각을 멈추게 한다. 


  광배와 대좌 등은 없어졌지만 상() 자체는 완전한 불상이며 9세기에 성행하던 철조 비로자나불의 하나이다. 머리는 역시 이 시대에 유행하던 나발()에 육계() 표현이 둔화되고 있지만, 높고 뚜렷한 것이 특징이다. 타원형 얼굴에 길고 예리한 눈, 평범한 코이며 상체는 늘씬하나 몸의 율동감은 없고 지권인()을 하여 자세가 더욱 경직되었다. 법의()는 통견()이며 가슴을 넓게 벌렸고 옷 무늬는 기본적으로 평행(平行) 옷 무늬이다.

본래 전남 광산군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 현 위치로 옮긴 것이며, 옮길 때에도 대좌와 광배는 없었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주 증심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光州 證心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두산백과)


현대적인 구조를 겸한 산신각



  산신각은 오백전과 비로전 뒤쪽 사이에 있다. 

아침햇살 내리는 증심사 경내는 지상과 극락 사이를 이어주는 곳이다. 

산사가 신비롭고 아름답고 조용하다. 

여기저기서 동시에 들려오는 독경소리가 사찰을 맴돌아 나뭇가지를 흔들며, 하늘로 올라간다. 

바람에 흔들리는 잔 나뭇가지의 속삭임과 독경 소리에 파르르 떨리듯 가만히 스치는 청아한 목탁소리는 서로 닮은 듯도 하고 전혀 다른 듯도 하다. 

산중 바람과 독경과 목탁소리는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이런 어울림은 천상의 소리로 내려와 나의 두 귀를 맑게 씻고 다시 날아오른다.

심신이 안온하다. 



  증심사 경내를 둘러보고 돌아가는 길, 

올라올 때 들렸던 의재 박물관을 지나, 관풍대를 바람처럼 스쳐가며 걷는다. 

이글 앞에 올렸던 문빈정사를 지나쳐 뒤돌아보면, 무등산도 자꾸만 멀어진다. 

그러나 맑게 깨어난 심신은 한동안 지친 삶의 위로가 되어주니, 그러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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