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를 연 화가 조토 이야기
이제 고대 유물을 다룬 영국박물관 이야기는 끝나고 시대순을 따라 르네상스의 보물 창고인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의 작품들과 작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서양미술사에서 고대와 르네상스 사이의 중세는 흔히들 암흑기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중세는 기독교가 지배한 시대인데, 기독교는 우상의 형상을 만드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유명한 십계명의 한 구절이다.
" 제일은 너는 나 이외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
" 제이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이런 강력한 계명의 영향으로 중세 초기에는 그 어떤 조각과 회화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그 전통이 계속 강력한 규제로 작동하여 이어져 왔다.
그리스와 로마의 매끈한 조각상을 만드는 기술들이 이 중세 시대에는 이단시되고 금지된 기술이 된 것이다.
그림은 일부 허용되었으나, 그마저도 교리를 쉽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그림만 교회당 내에서 허용되었다. 성경 속 주요 이벤트인 수태고지 (성모 마리아에게 천사가 예수의 잉태를 알리는 장면), 성자들의 이야기 등이 그 소재가 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중세의 그림은 황금색을 많이 사용했다. 신의 영광스러운 세상을 표현하는 색상으로 황금빛이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천국의 세상을 형용하는 수사로 주로 금빛 찬란한 세상이라는 표현이 널리 이용되었기에 그림 속 배경이 황금빛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중세 미술의 답답한 전통을 깨부순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중세 말기의 이탈리아 화가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이다.
어느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도 그 주인이 있다. 고대와 중세뿐만 아니라 현대에 와서도 예술의 주인은 그 시대의 권력을 가진 자의 것이었다.
고대의 미술작품은 신 또는 신성시되는 최고 권력자인 왕을 위한 것이었고, 서양의 중세 미술은 신을 위한,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이었다.
신의 교리를 담아내기에 급급했던 중세의 미술은 이런 이유들로 인해 그 당시 딱딱하고 경직된 신앙의 흔적이라고 할 있겠다.
하지만, 시대가 흘러 기독교의 힘은 점점 쇠퇴해져 가고 면죄부를 파는 등 타락한 종교인들의 모습에 신에 대한 외경심은 날로 줄어들어가고 인간의 눈으로 신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그 시작이 바로 조토의 작품들이다.
조토는 신이었던 예수와 신의 어머니였던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 인간의 표정을 담았다. 주검이 된 예수의 축 늘어진 모습은 중세의 신적 숭배의 대상이었던 예수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당시 사람들에겐 시각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토의 걸작으로 알려진 "그리스도의 생애 - 애도 (Lamentation)"라는 그림 속에 묘사된 예수와 마리아의 모습은 전통적인 중세의 화풍을 뛰어넘어 죽음에 이르러 무기력한 상태의 주검 예수와 이를 깊은 슬픔에 잠겨 바라보는 성모 마리아의 얼굴로 그려지고 있다. 비통에 잠긴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슬픔에 울부짖는 천사들의 모습까지 인간, 천사 모두에게 인간의 감정을 담아내고 있다.
이런 그림을 지금의 시점에 보면 당연한 걸 수 있겠지만, 당시 중세 미술의 세상에서는 신의 모습을 인간처럼 그려낸다는 점이 매우 충격적이었으며, 그 충격은 충격 그 자체로써만 기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고난, 슬픔을 공감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다른 차원의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교리적으로 보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세상을 구원하였는데, 어찌 이것이 슬픈 일이라 할 수 있나. 역설적으로 예수의 죽음은 지금도 승리의 순간으로 교리는 가르치고 있는데, 기독교 중심의 중세 사회에서 예수의 죽음을 슬픔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그림이 교리보다 먼저 신앙의 본질에 다가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의 겉모습에 대한 묘사는 없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예수의 형상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보통은 아래 그림처럼 그려지고 있다. 왜 아래와 같은 모습이 되었을까?
기원후 4세기를 지나면서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로 칙령이 내려져 로마제국은 기독교의 국가가 되었다.
이로 인해 모든 로마 제국의 시민들은 기독교 신앙을 가져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으며, 절대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젊은 모습을 교세 확장을 위해서 그리게 되었다.
예수는 왕의 왕인 신이었기에 신의 모습의 원형을 그 당시 로마 제국은 그리스의 神狀 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추정되고 있다.
그 원형이 바로 제우스와 제우스의 아들 태양신 아폴론의 모습과 유사한 모습으로 그려내게 되었다고 한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과 예수의 신성을 표현하기 위한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로마제국은 그리스의 신들을 통해 절묘한 타협점을 찾아내었고 이는 국교로써의 기독교를 제국의 구심점으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독교의 교리에 압도된 중세 기독교 미술에서 그려진 예수의 모습은 그리스의 신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인간처럼 그리면 안 되었기 때문에 표정이 없고, 상징으로써만 예수와 성인들은 그려지게 된다.
이러한 중세의 관습적 취향을 조토는 공간감과 감정을 담아냄으로써 극복하게 된다.
중세 미술은 평면적이고 단조롭다. 조토는 이런 중세 미술의 한계를 뛰어넘어 2차원의 평면 속에 3차원의 공간을 담아내려고 했다. 이를 잘 표현한 작품이 Ognissanti Madonna라는 작품이다.
14세기는 르네상스가 꽃피기 직전의 시대로서 르네상스 작품의 대표적인 기법인 원근법이 본격적으로 활용되지 전이었다. 화가이기도 했지만 건축가이기도 했던 조토는 입체감을 표현할 수 있었고, 그런 조토의 역량을 평면적인 중세의 화풍에 3차원의 입체감을 도입함으로써 그림에 생동감을 입히게 된다.
오늘날에는 르네상스 이후 제작된 뛰어난 원근법의 그림들을 많이 접하고 익숙하기에 조토의 작품은 앳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중세의 신학에 압도된 그림에 인간의 생명력을 불어넣음으로써 인간 중심의 예술이 자리 잡는데 큰 디딤돌이 되었으며, 이런 조토의 화풍의 영향으로 3차원 원근법은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그림에 활용되게 된다.
원근법으로 인해 2차원 평면에 3차원의 입체감을 옮길 수 있었고, 이는 그림을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과 생생함을 통해 더 큰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게 된다.
르네상스 하면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떠올리지만, 이들은 조토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존재한 거장일 뿐이다.
어찌 보면 이 장면은 데쟈뷰처럼 갈릴레오라는 거장의 어깨 위에 올라서 대 우주를 통합하는 물리학 이론을 완성시킨 뉴턴이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다.
이렇게 신 중심의 중세를 극복하고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한 예술과 과학이 등장하는 시기를 우리는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이 르네상스 예술의 출발점에 바로 조토의 미학이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