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과 망원경 연재를 마치며
어느덧 미술관과 망원경 사이 연재의 마지막 편까지 오게 되었다.
지난 연재 글들을 돌아보니 내가 공부한 내용들이 새삼 새롭다.
50대의 기억력이란. 내가 기억하는 건 오직 열심히 리서치하고 정리했다는 사실 그 자체.
보티첼리의 말년이 비극적이었고, 미켈란젤로가 그러했고, 마크 로스코의 말년도 쓸쓸했다. 다빈치는 세기의 천재로 각국에서 귀빈 대접을 받았고 앤디워홀은 실크스크린으로 젊어서부터 유명세를 떨쳤다.
갈릴레오는 하늘을 건드려서 말년이 힘들었고, 괴팍한 뉴턴은 젊어서부터 나이 들어까지 자기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지냈다.
아인슈타인은 어떤가? 뉴턴이 설계한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조화로운 만유인력의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오늘은 빛의 절대속도로 인한 시간의 상대성,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사건의 절대성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빛은 이상한 존재다. 눈으로 보면 그냥 환하고 따뜻한 것 같지만,
물리학에서 빛은 파동이면서 동시에 ‘광자’라는 입자로 행동하는 독특한 물체다.
돌멩이처럼 무게가 있는 건 아니지만, 힘을 주고받고, 튕기고, 휘어지고, 운동량을 가진 진짜 물체다.
이 물체에는 아주 중요한 특징이 하나 있다.
누가 보든, 어떤 방향에서 보든, 얼마나 빠르게 달리든 빛의 속도는 항상 똑같다.
여기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만약 어떤 물체의 속도가 누구에게나 같게 보인다면,
그 물체만 특별한 게 아니라 세상이 그 물체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아인슈타인은 바로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빛의 속도가 절대라면, 다른 건 변해야 한다.”
그 ‘다른 것’이 무엇이냐?
바로 시간과 공간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시간은 사실 절대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속도로 달리면,
빠르게 달리는 사람의 시간은 더 천천히 흐른다.
높은 산에 있는 시계는 평지의 시계보다 아주 조금 빨리 흐르고,
지구보다 중력이 센 곳에서는 시간이 더 느리게 간다.
즉, 사람마다, 위치마다, 속도마다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
이 말을 처음 들으면 “말도 안 된다!” 싶지만
이미 GPS 위성에서 매일 실제로 보정해서 쓰고 있는 사실이다.
이 보정 안 하면 내비게이션이 엉뚱한 곳으로 안내한다.
여기서 재밌는 역설이 나온다.
시간도 다르고, 거리도 다르고, 동시에 일어난 일조차 사람마다 다르게 보이는데
그렇다면 사람들은 도대체 ‘같은 세계’를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사건(Event)이다.
사건은 아주 단순하다.
“어디서, 언제,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나타내는 4차원 시공간의 점 하나다.
번개가 친 순간, 공이 땅에 닿는 순간, 스위치를 켠 순간.
이 점 하나는 누가 보든 변하지 않는다.
각자가 다른 시계를 쓰고 있어도
그 시계가 가리키는 숫자가 다를 뿐이지
“그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사건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시간 속을 살면서도
같은 세계를 공유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세계는 그래서 이렇게 정리된다.
빛은 우주의 기준이 되는 ‘물체’다.
빛의 속도를 지키기 위해 시간과 공간이 변한다.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게 흐른다.
그럼에도 사건은 누구에게나 같은 절대적 기준이 된다.
우주는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수많은 사건들이 찍혀 있는 시공간의 거대한 지도다.
이렇게 보면 어렵게 느껴졌던 물리학적 개념들이 전부 하나로 결합된다.
빛이 기준을 잡고, 시간은 흔들리고, 사건은 그 흔들림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 좌표가 된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는 빛이라는 존재 위에서, 각자가 다른 시간을 살면서도
같은 ‘사건’을 공유하는 세계다
우주가 사건으로 이루어졌듯, 우리의 삶도 사건으로 이어진다
우리 가족이 26년이라는 시간에 유럽이라는 공간을 거닐고 있다면 그 모든 일은 “미술관과 망원경 사이” 연재라는 작은 사건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글쓰기로 온 가족이 함께 움직이고 여행을 준비하는 글이 사람들을 움직인다.
연재하는 동안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신 덕분에 브런치라는 낯선 공간에서 정을 붙이고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감사와 함께 “미술관과 망원경 사이” 연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