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이 Apr 28. 2023

어떤 방식으로든 너를




사람은 참 희한한 동물이다.


10시 반이면 칼같이 잠자리에 드는 사람인 내가

이렇게 늦은 새벽까지 잠 못 이루고 이런 말도 안되는 글이나 써 재끼는 날도 있는 걸 보면.




가슴이 너무 벅차오르는,

심장박동이 제멋대로 구는 그런 날.



이런 날만큼은 대놓고 유치해지기도 하고 감성에 절어 있기도 하고 그런다.

쉽게 찾아오는 순간이 아닌 만큼, 나는 기꺼이 이 최면의 시간을 즐기기로 한다. 얄궂은 마법같은 시간.







"나 프랑스어 공부 다시 시작했어."

-오 진짜?

"응."

-언제부터?

"저번 주 부터."


내가 대답하자마자 너는 프랑스어로 뭐라뭐라고 말했다. 세 문장 정도 꽤 길게 얘기했는데 첫 문장말곤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말하는 속도가 너무 빨랐고, 그 와중에 얼핏 어떤 운율같은 게 있어 듣기엔 좋았다.


"뭐라고 한 거야?"

-맞춰 봐. 프랑스어 공부한다며.

"아 너무 빨리 휘리릭 말했잖아."

-아예 못 알아 들었어?

"첨에 '솔직히 말할게' 라고 했지? 그 다음은 모르겠어."

-잘 됐다, 비밀이야. 프랑스어 공부 더 열심히 해.

"아 뭐야. 뭐라고 한건데, 알려 줘."

-안 돼. 한국어로는 도저히 못 말하겠어.


나도 너 때문에 다시 프랑스어를 공부한다는 말은 차마 못했다. 프랑스어를 발음하는 너의 호흡 하나하나를 소중히 간직하고 싶으리만큼 네가 프랑스어로 말하는 순간을 내가 좋아한단 거, 너는 알까. 너와 프랑스어로 짧은 대화를 나누고 프랑스어로 된 원서를 함께 읽는 상상을 하면 나는 마음이 온통 연보라색으로 물드는 기분이 든다.


"뭐 이상한 말했어?"

-그럴리가.

"이상한 말했지? 욕 같은거."

-다시 한 번 말해줄게.

"응, 대신 이번엔 천천히 말해!"


내 요구가 끝나기가 무섭게 너는 나를 약올리기라도 하는 듯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휘리릭 문장을 뱉어냈다. 얼핏 쥬뗌과 펄스낼리티가 들렸다. 대충 알아듣는 척을 해 실토하게 하는 작전으로 간다.


"아, 이래서 한국어론 못 말하겠다고 한 거구나."

-어? 알아 들었어? 엄청 빨리 말했는데."

"아 당연히 알아들었지!"

-진짜?

"음, 어!"

-반박자 쉬는 거 보니까 거짓말이네.

"아냐! 진짜 알아 들었어."

-뭐라고 했는데, 내가?

"에이, 그건 나도 말하기가 좀 민망쓰지."

-모르면서, 거짓말.

"대충 뉘앙스는 안다 이거야."

-그래?

"아 그럼!"

-그럼 됐어.




그럼 됐다니,


힝 작전대실패!








예정에 없는 일이란 건 가끔 참 멋진 것 같아.


네가 말했고,

나는 무슨 말이야? 되물었다.



예정없는 일이란 건,

이런 거지.


네가 말했고




그 바로 다음 순간,


나는 네 말을 전적으로 이해하고 말았다.







-넌 참 투명하면서도 어떨 땐 아주 결정적으로 불투명하단 말야.

"나?"

-어, 너너너.

"내가 투명해?"

-그 정도면 투명하지.

"결정적으로 불투명하단 건 또 뭐야."

-말 그대로 아주 결정적인 순간엔 또 불투명하단 말이야.

"그런 적 없는데 난."

-없긴 뭘. 하지만 대부분 투명해.

"좋은 거지?"

-좋은 거지. 근데 항상 완전 투명한 건 아니라니까.

"그게 내 매력인 걸로 하자."



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아니 째려본다.



"왜, 동의 못 해?"



-어 몰라, 반동의.


너는 무심하게 대답하고선 아이패드로 시선을 옮긴다.


반동의라니, 어이가 없다.


   





최근 꽤 좋은 이직 제의를 받았다.

대표와의 면접까지 일사천리에 진행됐고 그 쪽에서 제시한 조건도 뭐 그정도면 썩 괜찮았다.

나는 내가 가장 믿는 단 세 명에게만 이 사실을 말하고 같이 의논했다.


이것저것 따져보고 생각하고 고민한 끝에


결국,

이직은 안 하기로 했다.


제안한 사측에 거절 의사를 밝혔더니

연봉을 좀 더 올려주겠다고 했다.



죄송하다고 했다.



연봉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있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많이 했는데,

잘 한 결정이라 생각한다.



그래, 열심히하면 결국엔 다 성과가 있구나.

아닌듯해도 다 지켜보고 있구나.


인정 받았다는 생각에 묘하게 뿌듯했다. 그것만으로도 정말 큰 위안이 됐다.



"잘 했어.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네가 목표하는 큰 그림을 보고 가자."



너의 그 말이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바로 그게, 내가 가장 듣고싶은 말이었던 것 같다.


지금 이직하는 것 보다

지금 돈 몇천몇백 더 받는 거 보다

나에게 중요한 건 다른 거였으니까.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벗어나고 싶던 회사였는데


이젠 전혀 다른 곳 같다.



돈은 물론 중요하지만,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돈이 아니다.




그래, 큰 그림을 보고 가자.






-아이스크림 먹을까?

"그래."




-네가 하는 건 다 따라하고싶어.


그러면서 너는 내가 고른 아이스크림과 똑같은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그런 너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우리는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아이스크림은 거짓말처럼 달고 부드럽고

예정에 없던 멋진 일처럼 소소하면서 큰 행복을 주었다.







솔직하게 말할게.

나는 어떤 식으로든 널 좋아하고 말거야. 결국엔 그렇게 될 거야.

네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성격이든.






한국어로는 도저히 못하겠다며

프랑스어로 휘리릭 내뱉었던 말을


너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천천히 달콤하게

그러면서 아무렇지 않게

잘도 얘기한다.


마치 노래가사를 읊듯이,

남의 일인듯 크게 감정을 싣지 않고 그냥 담백하게.


그 순간 뭔가 심장을 훅 얻어 맞은 듯 했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널 좋아하고 말거야, 어떤 식으로든, 어떤 식으로든


머릿 속에 고장난 라디오라도 박혔나,

계속되는 구간반복.




덕분에 나는 아이스크림을 허겁지겁 먹기 바쁘다.




아이스크림이 차가워서 다행이야.




멍청하게 그런 생각이나 하면서 -









서울시청 앞 광장에 누워,

햇살을 맞으며 책을 읽었다.


따뜻한 햇빛이 이마에서부터 발끝까지 쭈욱 타고 내려오는 게 느껴졌다.




일광욕을 하면서 즐기는 독서라니,

너무 행복한 순간이다.




몸에 힘을 축- 뺀 채 빈백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 봤다.



드넓은 하늘을 도화지 삼아

마음 속에 흐르는 말을 한 글자 한 글자 꺼내어

눈으로 써내려갔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널 좋아하고 말거야. 결국엔 그렇게 될 거야."





그 말을 생각하면

장난같으면서도 진지하고

순수하면서도 발칙해서

너무 어이없고

그래서 터무니없이 사랑스러웠다.





나는 몇번이나 구름이 흐르는 파란하늘에

같은 문장을 써내려갔다.







따뜻한 햇살이 도심 한복판을 내리쬐고 있었다.






이전 15화 어느 주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