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참 희한한 동물이다.
10시 반이면 칼같이 잠자리에 드는 사람인 내가
이렇게 늦은 새벽까지 잠 못 이루고 이런 말도 안되는 글이나 써 재끼는 날도 있는 걸 보면.
가슴이 너무 벅차오르는,
심장박동이 제멋대로 구는 그런 날.
이런 날만큼은 대놓고 유치해지기도 하고 감성에 절어 있기도 하고 그런다.
쉽게 찾아오는 순간이 아닌 만큼, 나는 기꺼이 이 최면의 시간을 즐기기로 한다. 얄궂은 마법같은 시간.
"나 프랑스어 공부 다시 시작했어."
-오 진짜?
"응."
-언제부터?
"저번 주 부터."
내가 대답하자마자 너는 프랑스어로 뭐라뭐라고 말했다. 세 문장 정도 꽤 길게 얘기했는데 첫 문장말곤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말하는 속도가 너무 빨랐고, 그 와중에 얼핏 어떤 운율같은 게 있어 듣기엔 좋았다.
"뭐라고 한 거야?"
-맞춰 봐. 프랑스어 공부한다며.
"아 너무 빨리 휘리릭 말했잖아."
-아예 못 알아 들었어?
"첨에 '솔직히 말할게' 라고 했지? 그 다음은 모르겠어."
-잘 됐다, 비밀이야. 프랑스어 공부 더 열심히 해.
"아 뭐야. 뭐라고 한건데, 알려 줘."
-안 돼. 한국어로는 도저히 못 말하겠어.
나도 너 때문에 다시 프랑스어를 공부한다는 말은 차마 못했다. 프랑스어를 발음하는 너의 호흡 하나하나를 소중히 간직하고 싶으리만큼 네가 프랑스어로 말하는 순간을 내가 좋아한단 거, 너는 알까. 너와 프랑스어로 짧은 대화를 나누고 프랑스어로 된 원서를 함께 읽는 상상을 하면 나는 마음이 온통 연보라색으로 물드는 기분이 든다.
"뭐 이상한 말했어?"
-그럴리가.
"이상한 말했지? 욕 같은거."
-다시 한 번 말해줄게.
"응, 대신 이번엔 천천히 말해!"
내 요구가 끝나기가 무섭게 너는 나를 약올리기라도 하는 듯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휘리릭 문장을 뱉어냈다. 얼핏 쥬뗌과 펄스낼리티가 들렸다. 대충 알아듣는 척을 해 실토하게 하는 작전으로 간다.
"아, 이래서 한국어론 못 말하겠다고 한 거구나."
-어? 알아 들었어? 엄청 빨리 말했는데."
"아 당연히 알아들었지!"
-진짜?
"음, 어!"
-반박자 쉬는 거 보니까 거짓말이네.
"아냐! 진짜 알아 들었어."
-뭐라고 했는데, 내가?
"에이, 그건 나도 말하기가 좀 민망쓰지."
-모르면서, 거짓말.
"대충 뉘앙스는 안다 이거야."
-그래?
"아 그럼!"
-그럼 됐어.
그럼 됐다니,
힝 작전대실패!
예정에 없는 일이란 건 가끔 참 멋진 것 같아.
네가 말했고,
나는 무슨 말이야? 되물었다.
예정없는 일이란 건,
이런 거지.
네가 말했고
그 바로 다음 순간,
나는 네 말을 전적으로 이해하고 말았다.
-넌 참 투명하면서도 어떨 땐 아주 결정적으로 불투명하단 말야.
"나?"
-어, 너너너.
"내가 투명해?"
-그 정도면 투명하지.
"결정적으로 불투명하단 건 또 뭐야."
-말 그대로 아주 결정적인 순간엔 또 불투명하단 말이야.
"그런 적 없는데 난."
-없긴 뭘. 하지만 대부분 투명해.
"좋은 거지?"
-좋은 거지. 근데 항상 완전 투명한 건 아니라니까.
"그게 내 매력인 걸로 하자."
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아니 째려본다.
"왜, 동의 못 해?"
-어 몰라, 반동의.
너는 무심하게 대답하고선 아이패드로 시선을 옮긴다.
반동의라니, 어이가 없다.
최근 꽤 좋은 이직 제의를 받았다.
대표와의 면접까지 일사천리에 진행됐고 그 쪽에서 제시한 조건도 뭐 그정도면 썩 괜찮았다.
나는 내가 가장 믿는 단 세 명에게만 이 사실을 말하고 같이 의논했다.
이것저것 따져보고 생각하고 고민한 끝에
결국,
이직은 안 하기로 했다.
제안한 사측에 거절 의사를 밝혔더니
연봉을 좀 더 올려주겠다고 했다.
죄송하다고 했다.
연봉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있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많이 했는데,
잘 한 결정이라 생각한다.
그래, 열심히하면 결국엔 다 성과가 있구나.
아닌듯해도 다 지켜보고 있구나.
인정 받았다는 생각에 묘하게 뿌듯했다. 그것만으로도 정말 큰 위안이 됐다.
"잘 했어.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네가 목표하는 큰 그림을 보고 가자."
너의 그 말이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바로 그게, 내가 가장 듣고싶은 말이었던 것 같다.
지금 이직하는 것 보다
지금 돈 몇천몇백 더 받는 거 보다
나에게 중요한 건 다른 거였으니까.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벗어나고 싶던 회사였는데
이젠 전혀 다른 곳 같다.
돈은 물론 중요하지만,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돈이 아니다.
그래, 큰 그림을 보고 가자.
-아이스크림 먹을까?
"그래."
-네가 하는 건 다 따라하고싶어.
그러면서 너는 내가 고른 아이스크림과 똑같은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그런 너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우리는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아이스크림은 거짓말처럼 달고 부드럽고
예정에 없던 멋진 일처럼 소소하면서 큰 행복을 주었다.
솔직하게 말할게.
나는 어떤 식으로든 널 좋아하고 말거야. 결국엔 그렇게 될 거야.
네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성격이든.
한국어로는 도저히 못하겠다며
프랑스어로 휘리릭 내뱉었던 말을
너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천천히 달콤하게
그러면서 아무렇지 않게
잘도 얘기한다.
마치 노래가사를 읊듯이,
남의 일인듯 크게 감정을 싣지 않고 그냥 담백하게.
그 순간 뭔가 심장을 훅 얻어 맞은 듯 했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널 좋아하고 말거야, 어떤 식으로든, 어떤 식으로든
머릿 속에 고장난 라디오라도 박혔나,
계속되는 구간반복.
덕분에 나는 아이스크림을 허겁지겁 먹기 바쁘다.
아이스크림이 차가워서 다행이야.
멍청하게 그런 생각이나 하면서 -
서울시청 앞 광장에 누워,
햇살을 맞으며 책을 읽었다.
따뜻한 햇빛이 이마에서부터 발끝까지 쭈욱 타고 내려오는 게 느껴졌다.
일광욕을 하면서 즐기는 독서라니,
너무 행복한 순간이다.
몸에 힘을 축- 뺀 채 빈백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 봤다.
드넓은 하늘을 도화지 삼아
마음 속에 흐르는 말을 한 글자 한 글자 꺼내어
눈으로 써내려갔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널 좋아하고 말거야. 결국엔 그렇게 될 거야."
그 말을 생각하면
장난같으면서도 진지하고
순수하면서도 발칙해서
너무 어이없고
그래서 터무니없이 사랑스러웠다.
나는 몇번이나 구름이 흐르는 파란하늘에
같은 문장을 써내려갔다.
따뜻한 햇살이 도심 한복판을 내리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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