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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Jul 09. 2023

뭉툭해진다




뾰족했던 것이 자꾸만 뭉툭해진다

날카로웠던 모서리가 닳고 닳아 해진다

각이 사라지고 갈리다 둥글어진다



그걸 좋다 말해야 하나 슬프다 말해야 하나,

나는 쉽사리 판단하지 못한다.



그걸 성숙, 이라고 하면 나는 날것의 순수를 뾰족하고 날카롭다 말해야 하기 때문에 차마 그러진 못 한다. 그렇다면 그걸 무어라 불러야 할까, 나는 고민하다 정의되지 않는 그대로 두기로 한다.


슬플 것도 아쉬울 것도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지만 뭉툭해진다는 건 상처를 동반한다, 필연적으로. 스치고 쓸리고 찔리고 갈리는 과정에서 여물지 못하는 환부. 뭉툭해지는 시간보다 결코 더 빨리 아물지 못하는, 찢겨진 상처가 말해주는 시간. 그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뭉툭해진 거야. 거창할 건 없지만 별 거 아닌 건 결코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건 더더욱 아냐. 그래서 사회에선 그걸 성숙 혹은 성장이라 부르기로 했나. 성장은 왜 아픔을 수반하나요. 꼭, 그래야만. 나는 아뿔싸하며 말을 멈춘다.



그렇게 말하면 뭔가 좀 슬퍼지나. 슬퍼져, 버리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돌아섰던 날이 있다. 핸드폰에선 지잉지잉 계속해서 알람이 울려댔지만 확인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지하철에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문자들에 답장하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은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아니다, 조금 추웠나. 다시 계절은 휘리릭 지나 여름이 왔는데 장마가 와서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가 되니 문득 그날이 생각났다. 아니다, 요즘은 조금 더운가.


나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고 미지근했다. 네가 잘되길 바래, 하지만 내 마음은 차갑게. 너를 응원해, 하지만 그 마음의 온도는 차갑게. 뜨겁게가 아니라 차갑게. 영영 차갑게 유지할 거라 다짐하면서도 나는 그날 미지근한 상태로 집까지 걸어갔다. 날씨가 춥지도 덥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래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첫사랑, 하면 여전히 그가 떠오르지만 슬프지 않듯이. 아무렇지 않듯이 그렇게. 슬프다고 슬픈 노래까지 듣고 싶지는 않은 그런 미지근함으로, 그런 적당한 아둔함으로.







착한사람 중에 제일 나쁜 사람과 나쁜사람 중에 제일 착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사람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많은 것이 이해되고 말았다.







오랜만에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 회사 앞인데도 오랜만에 가는 느낌이었다. 사고 싶은 책 제목을 아이폰 메모장에 적으면서 설레고 행복한 감정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한 권, 두 권, 세 권. 3권의 책을 모두 찾아 훑어보고 그 중 두 권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토록 단순하게 행복해지는데.


침대 맡에 놓아둔 책에서 책갈피처럼 꽂아 둔 흰 종이를 슥 뺏더니 교보문고 영수증이었다. 한 달 전에 구매했던 영수증. 한 달 전에도 내가 교보에 갔었나? 그게 한 달밖에 안 지났나? 세 달은 족히 지난 것처럼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나는 책을 읽으면 행복해져. 적당히 둔해지고 뭉툭해지고 아득해질 수 있어.





서점에, 가자.








입만 열면 진실이 쏟아져나오는데

나는 결코 방아쇄를 당기지 않는다.

진실? 진실.


너는 피하고 있었지만,

누구보다 네가 가장 잘 알겠지.



기어코 까발려질 그 것 들 을


나는 함구한다.








예민과 둔감

날카로움과 뭉툭함

빠름과 느림



헛되이 부지런하고 예민해지지 않으리라



스쳐도 다치지 않을 정도로

너무 예민하고 날카롭고 빠르지 않게


다만,


답답하지 않을 정도로

너무 둔감하고 뭉툭하고 느리지 않게







나 듣고싶은 노래 들으면서 혼자 좀 신나도 될까, 아 어어 신나는 노래라서 신나는 건 아냐. 오히려 좀 조용한 노래인데 그걸 들으면 신나거든. 너도 같이 들어볼래? 고요한 여름밤에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놓고 이 노래도 크게 틀어 놓고 들으면 시공간을 초월하는 기분이 들면서 아주 비밀스럽고도 신나고 아득해져, 아-득-








후텁지근한 날씨에 억수같이 비가 쏟아져 아스팔트도 나무도 거리도 도로도 내 마음도 적당히 차갑게 식자

나는 가까스로 미지근함을 회복한다. 아둔함을 유지한다. 피곤한 게 싫어요, 싫어서요.






몇 번의 불면의 밤, 같은 게 있었나 생각해 보면 확실히 있긴 있었던 것 같고,

하지만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 없었던 셈 쳐도 될 것 같기도 하고 -

별 쓸데없는 일로 정신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 불면의 원인을 특정할 순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렴 어때, 뭐 다 의미 없는 거 같기도 하고.



디카페인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셨는데 잠을 못 잤어.

다카페인이 아니었던 걸까요,

아님 내가 예민한 걸까요.



들려오는 네 안부가 좋든 나쁘든 나는 이제 별 기색 없어, 알잖아. 상관없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나쁘게 말하고 싶은 생각 없어요

못되게 굴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그저 뭉툭하게

둥글게


그렇게 미지근하게 있고 싶을 뿐예요, 지금 날씨처럼.







"30, 50, 79"

-그게 뭐야?

"오늘 읽은 시집에서 좋았던 시가 있던 페이지"

-책 제목은?

“죄책감”






내 이름 불러 줘.



아니,

부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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