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하나가 되었다
작은 지구를 하나 만들고 싶다. 거기에는 너랑 나만 살았으면 좋겠다. 지구를 만든 다음엔 그걸 반으로 나누고 싶다. 그 안에 우리 둘을 가두고 싶다.
눈 떠보니 아무것도 없다. 사방이 텅 비었다. 세상은 온통 하얗다. 하늘도, 땅도 온통 하얀 색뿐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날 보는 이도, 듣는 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엔 정말 나 하나뿐이다. 이 외로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걷는 것밖에는 없다.
나는 걸었다. 끝을 향해 걸었다. 끝이 있다고 장담은 못하지만 왠지 있을 것 같았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게 날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이 나아졌다. 그래서 그 끝만 멍하니 보며 하염없이 걸었다.
점점 무릎이 아파왔다. 잠깐만 앉아서 쉬고 싶었다. 이 새하얀 땅 위에 철푸덕 앉으면 소파처럼 푹신할 것 같았다. 그렇게 스르르 잠이 들어 낮잠이라도 자고 일어나면 다시 힘 내서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치만 여기서는 쉬거나 잠을 잘 수 없었다. 한 방향으로만 쭉 걷지 않으면 끝을 만날 수가 없었다. 자칫 한눈 팔았다가는 모든 걸음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야 했다. 몸이 무너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주며 계속 걸었다. 손끝과 발끝이 저려왔다.
내가 만든 이 지구에서, 너는 무얼 하며 지내고 있을까. 그래도 너는 이 지구를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니까, 나를 원망하진 않을 것이다. 다행이었다. 널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이것만은 끝까지 비밀로 해야지, 생각했다.
또 생각했다. 네가 날 잊었으면 어떡하지. 만약에 네가 날 잊었으면, 날 잊고 이 지구에서 살아남기를 포기했으면. 아니다. 너는 나를 잊을 수가 없다. 그래야만 네가 나에게 온다. 너는 나를 위해 어디든 가겠다고 했으니까. 끝까지 살아남겠다고 늘 말했으니까.
왼발 끝에 무언가 툭, 하고 걸렸다. 고개를 들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크게 떴다. 발걸음을 막은 것은 하얀 벽이었다. 드디어 끝이 내 발끝에 닿았다. 나는 이내 끝을 등지고 서서, 내가 걸어온 길과 하늘과 땅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을 눈에 담은 순간 알 수 있었다. 내가 있는 이 세상은 커다란 반쪽짜리 구였다.
반나절만 있으면 내가 서 있는 이 끝에서 저 반대쪽 끝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루를 꼬박 새면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못할 거 없지. 그걸 알아차린 순간부터 가장자리를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땅과 하늘의 경계를 밟고 또 밟으며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걸어가는 동시에 날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걸으면서 날다가 네 생각이 났다. 너도 나와 함께 여기에 와 있을까. 보이지도 않는 네가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럼 나는, 어딘지도 모르는 여기에서 널 생각하는 나는 여전히 네가 아는 그 모습일까. 내 모습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무것도 없는 여기서는 나를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네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 네가 나를 대신 봐 주면 좋겠다. 날 볼 수 없는 나를 위해. 그럼 나도 똑같이 너를 봐 줄 수 있으니까. 널 볼 수 없는 너를 위해.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대신 봐 주면 좋겠다.
너는 여전히 내가 아는 그 모습, 그 얼굴일까. 웃을 때는 여전히 눈을 살짝 찡그린 채 수줍어 하며 윗잇몸을 반쯤만 드러낼까. 슬플 때는 여전히 눈물을 삼키려고 입꼬리를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억지로 올렸다가 할까.
아니다. 어차피 이제는 너를 볼 수가 없다.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 떠올릴 필요도 없다. 이만큼 걸으면 네가 날 데리러 와줄 줄 알았는데, 어디선가 나타나서 날 반겨줄 줄 알았는데, 아무리 많이 걸어도 네가 없다. 이제 그만 걸을까, 생각하고 툭, 걸음을 멈추는데 네 얼굴이 다시 떠오른다. 조금만 더 걸으면 정말로 네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까. 다시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는다.
이 가장자리에서 너를 기다린 지 벌써 하루가 다 되어가는 것 같다. 그래도 한 곳에서 기다리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처음 여기에 온 순간부터 움직이지 않고 이 자리를 지켜왔다. 이렇게나 시간이 많이 흐른 걸 너는 알고 있을까. 너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너의 세상 속을 헤매고 있을까. 아니면 날 찾고 있을까.
문득 울고 있는 네가 보이는 것 같다. 아마 내가 널 울게 했나 보다. 너와 하나가 되고 싶었던 것뿐인데, 너는 내 마음은 생각도 못하고 울고만 있는 것 같다. 차라리 네가 날 미워하면 좋겠다. 착한 너는 날 미워하는 법도 모르지.
네 생각에 잠겨 있다가 몸이 미세하게 떨린다. 잠시 숨을 죽인다.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치켜든다. 다시 몸이 떨린다. 이번에는 좀 더 강한 울림이다. 다시 몸이 떨리고, 이제야 나는 웃을 수 있다. 네가 나에게로 오고 있다. 이 반가운 울림 앞에 나는 그만 견디지 못해 털썩 주저앉고 만다. 다시 일어나 천천히, 널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땅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 새하얗고 단단한 것이 가루가 되어 무너지는 것을 나는 그저 바라만 본다. 곧 있으면 나도 그것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나는 무엇도 할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 저 밑으로 떨어져 사라질 내 모습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힘 없이 눈을 감는다.
쿠궁, 쿵. 땅이 무너지는 소리는 금세 멈춘다. 다시는 뜰 수 없을 줄 알았던 두 눈이 점점 뜨인다.
눈 앞에는 익숙한 네가 보인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너는 지구 반대편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너와 나는 서로 뒤엉켜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너는 나를 보며 말한다. 나 이제 알 것 같아, 하나가 된다는 게 어떤 건지. 네가 그토록 바라던 거 말이야. 뒤엉킨 몸을 바라보며 내가 답한다. 우리 이제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 어느 한 명이 먼저 죽고, 어느 한 명이 더 오래 살고 그런 거 없이. 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내가 기억하는 그 웃음이다.
너와 나는 하나가 되었다. 마침내 우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