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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세상 Feb 27. 2024

인간은 자유다

그리스인조르바

예전 읽은 책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연필로 쭉쭉 밑줄을 그었거나, 혹은 포스트잇으로 몇몇 군데 알록달록 색을 입혀놓은 책.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두 책은 모두 노인이 주인공입니다. 물론 노인이 주인공인 책은 ‘코맥 매카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있습니다. 아주 복잡하고 건조한 삶을 그린 이야기인데, 코엔형제가 영화로 만든 작품이기도 합니다.      


헤밍웨이의 노인은 세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고독을 견뎌내며 꿈을 꾸었고, 카잔차키스의 조르바는 세상과 거리를 두었지만 고독을 견뎌낼 수 없었기에 웃다가 울다가 서서 죽었으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벨은 노인이 되어서도 인간과 이 사회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으며 연륜이 든 노인이 되어서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사회는 없다고 힘없는 노인을 보여줍니다.


‘노인과 바다’가 주는 가치는 ‘인내’이고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으로 남았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가치는 누구나 평생을 꿈꾸는 ‘자유’이고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 정도로 남았습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묵직한 ‘성찰’을 던지며 역시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으로 남았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이 커가는 나날. 모처럼 위안을 느낄 수 있게 한 조르바는 어느새 예전의 등대에서 이제는 카운슬러이자 은인이 되었습니다. ‘사물을 제대로 보고 생각하려면 나이를 먹어야 해요. 이도 좀 빠지고. 이가 하나도 없는 늙은이라면 “얘들아, 울면 안 돼, 못쓴단다” 하고 소리치기 쉽지요. 하지만 이빨 서른두 개가 멀쩡하다면……’이라는 글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냄새가 난다느니, 주름진 얼굴이 추하다느니, 왜 이다지 말이 많다느니, 늘 피곤해 보인다느니, 하며 나이 듦에 스스로 움츠러들기 일쑤인데, 이 글은 참으로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나이 먹을수록 더 거칠어질 참입니다. “사람이란 나이 들면 침착해지는 법이야” 따위를 지껄이는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거란 말입니다’라고 조르바는 언성을 높이기도 했습니다. 독하게 반항하고 타협하지도 않고 세계와 당당히 맞설 거라는 조르바. 세상을 대하는 자세, 나이와 상관하지 않고 열정적이며 도전적이고 비타협적인 조르바. 이 얼마나 멋지고 유쾌한 인물이었는지요. 다시 만난 조르바는 젊음의 탄력을 잃어버린 내게 위안과 희망이 서려있는 일침을 안겨줍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꼭 한번 읽어 보라고 추천합니다. 조르바가 말하는 '인간론'이 아주 흡족하게 마음에 들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유입니다. 조르바가 내린 정의입니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항아리를 만들어야지, 접시를 만들어야지, 아님 램프라도 만들어야지, 귀신도 모를 물건을 만들까....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조르바를 안고 살지도 모릅니다. 다만 너무 영악하거나 혹은 용기가 없거나 혹은 주위를 너무 의식해서 탈이긴 하지만...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 보면 사람의 격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 책에서는 풍요로 그 기준을 정합니다 풍요로운 삶을 사는 자인지, 빈곤한 삶을 사는 사는 자인지가 풍요의 기준입니다. 흔히 말하는 빈부귀천은 그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천박한 기준이자 미스테이크입니다. 풍요는 부자가 아닙니다. 천하고 못 가진 자도 풍요롭게 살 수 있고 고귀하고 많이 가진 자도 빈곤하게 살 수 있습니다.


조르바의 삶을 보면 그의 풍요로운 삶에 매료됩니다. 조르바는 자신을 옭아맨 모든 줄로부터 자신을 끊어냅니다. 세속적 가치인 에고가 넘치고 넘치는 시대에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르바가 말하는 줄은 시간에 얽매인 습관적인 줄이자 현명을 가장한 계산적인 줄입니다. 계산적이고 습관적인 줄은 우리의 사념과 감정까지 취하게 만듭니다. 어느 날 시간이 흘러 우리의 의식이 깨어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이  자유로운 의식 상태입니다. 깨어나는 삶, 조르바의 삶은 그 자체가 자유입니다. 자신을 비운 뒤 그 자리에 넘치는 것은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사람들은 나이 먹는 것, 곧 늙어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어느 유행가에도 나이 들어가는 건 늙어 가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거라고 자위하지만, 사실 나이가 든다고 누구나 다 성숙해지고 익어가는 건  아닙니다. 성숙과 늙음은 관련이 없지요. 늙음은 열정을 빼앗고, 열정의 빈곤은 곧 영혼의 빈곤이기도 합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삶에 철저한 참여자로 남아야 합니다 그것이 조르바의 삶이기도 하고 내가 꿈꾸는 삶이기도 합니다.

죽기 전 아직도 못해봐서 후회하는 것, 아쉬운 것을 말하기보다는 살아있는 동안 그 열정을 다 쏟아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조르바의 삶에서 가장 빼놓을 수 없는  것, 광기입니다.

조르바의 광기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일할 때는 일로 하나, 사랑할 때는 사랑과 하나,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도 하나, 들에 핀 꽃과도 하나, 길거리를 구르는 돌멩이와도 하나가 되는 삶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풍요로운 삶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서 풍요로운 것이 아니라 나를 비워 존재계를 내 안에 가득 채워 버린 삶이야 말로이 풍요자체입니다.


헤밍웨이는 엽총으로 자살하였고, 카잔차키스는 백혈병으로 죽었습니다. 헤밍웨이의 유언은 ‘이 무의미한 인생의 행진을 접는다.’이고, 카잔차키스의 유언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롭다.’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다.

나는 자유다......‘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는 어쩔 수 없이 골라야 하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 두면만 존재하기에 사는 게 녹록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우린 마른 숨을 토해내며 헉헉거리며 또 살아야 하기에,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는 대단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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