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타 Oct 08. 2023

가지는 보라색일까, 남색일까.

[추억 한 그릇] 형형색색 '중국식 가지볶음'


엄마 손을 잡고 시장에 가면 가판대에 가지런히 누워있는 신기한 채소가 있었다.


 "저것도 먹는 거야?"라는 호기심은 곧 정말 맛없게 생겼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맛이 없어서 먹지는 못하지만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을 보니 장식품으로 사용되는 채소일 거라고 생각했다.


가지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색깔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린 마음에 먹음직스럽게 빨갛고 초록초록하거나 노란빛도 아닌 보라색 채소라니. 채소답지(!) 못한 색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남색일런지도 모르지. 긴 시간 보라색 채소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남색일 수도 있겠다는 소심한 마음이 든다. (보랏빛 남색?)


가지요리를 먹어본 기억이 없기 때문에 '가지는 맛없는 채소'라는 나의 선입견은 꽤 긴 시간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어쩌면 나물로 무쳐진 반찬을 모르고 먹었을지도 모르지만 가지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먹은 기억은 없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와는 다르게 가지를 사랑한다. 가지의 진한 보라빛깔과 호리병 같은 모양, 정성껏 구워냈을 때의 은은한 은 가지만의 고유한 매력이다.







블로그와 요리책을 보면서 무엇을 만들어 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던 재미가 시들해질 즈음, 요리잡지와 해외 요리 사이트들을 뒤져가며 레시피 사냥을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레시피 핑계로 맛있게 보이는 요리 사진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안타깝게도 제법 멋지게 보이는 요리의 레시피는 그만큼 독특한 재료가 필요하거나 조리법이 복잡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레시피로써의 효용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 도전해 볼 만한 요리들은 바로바로 실습(?)에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맛이 없는 요리, 노력 대비 시간과 재료비가 아까운 요리 등 꽤 많은 양의 요리들이 레시피 목록에서 삭제되었다.


모아놓은 레시피 중에 재료의 조합이 오묘한데(철저히 주관적인 기준!) 맛이 궁금한 요리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중국식 가지볶음'이다. 만들어 볼 용기를 낸 것은 이 레시피를 소개한 사이트에 달린 덧글이 모두 칭찬 일색이었다는 것과 필요한 재료가 아주 단순했다는 점이다. 재료가 단출한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가지와 토마토, 오이, 마늘, 굴소스, 간장, 설탕, 재료를 볶을 식용유가 이 요리에 필요한 전부. 가지는 먹어본 기억이 없고,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토마토와 오이를 함께 볶는다니. 과연 무슨 맛일까.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궁금함은 참지 못하는 성격 탓에 재료를 준비하고 저녁 식사 반찬으로 만들어 보기로 했다. 레시피는 단순하지만 가지를 길쭉하게 썰어서 맛있을 만큼 잘 구워야 하는 것이 포인트였다. 생각보다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일. 오일을 살짝 두른 팬에 가지를 굽듯이 천천히 익혀주고 잠시 다른 그릇에 옮겨둔 다음, 같은 팬에 마늘을 단 맛이 나게 볶고, 오이와 토마토를 볶는다. 다시 가지를 합체한 후 만들어둔 소스를 넣어 간이 베어 들게 볶아주면 완성.


나의 의심과는 다르게 음식을 만들 때 은은히 퍼지는 향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만큼 좋았다. 가족들도 가지볶음의 향에 감탄하며 부엌에 들렀다가 단지 가지를 볶았다는 말에 향이 정말 좋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오묘한 조합의 요리는 무슨 맛일까 큰 기대는 없는 눈치였다.


"이건 무슨 요리야? 근사하게 알록달록하네."

완성된 가지요리에 아버지는 요리 이름과 재료를 물어본다. 아버지도 나처럼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어떤 음식이든 경험하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라 어설픈 요리를 생산하는 내 입장에서는 최고의 고객이다.


나는 혹시 아빠 입맛에 맞지 않을까 괜스레 소심해진다. 그리고 곧 이런저런 부연설명을 늘어놓는다.

유명한 요리 사이트에서 본 레시피인데, 중국식 가지볶음이라고 인기가 좋대. 궁금해서 만들어 봤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채소 삼총사의 조합이 궁금해서 만들어 본 가지볶음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훌륭했다. 가족들 모두 이런 조합에 이런 맛이라니 신기해하며 다음에 또 만들어 줄 것을 주문한다.


아버지는 가지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 한참을 이리저리 돌려보시더니

"어릴 땐 가지가 참 싫었는데 말이야. 잘 만들었다. 근사한 요리네. 허허"

가지를 싫어했던 것이 마치 남겨두었던 숙제였던 것처럼, 그리고 마침내 그 숙제를 뒤늦게 해결하신 것처럼 흐뭇하게 웃으며 계속해서 가지만(!) 골라 먹는 아빠.


평생 좋은 것, 맛있는 것은 우리를 위해 희생해 준 아빠가 맛있는 가지만 골라먹는 모습을 보고 있는 나도 흐뭇했던 날, 가지라는 낯선 채소와 우리 가족이 오랜 냉전을 끝내고 찐하게 화해하는 날이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 가족은 가지 요리를 좋아하게 되었다.


한동안 강박적으로 가지가 들어간 레시피를 모았다. 요리에 가지가 들어가지 않으면 시시하고 재미가 없었던 듯하다. 하지만 역시나 우리 가족이 가장 좋아하는 가지요리는 중국식 가지볶음이다. 나는 가지를 구울 때만큼은 느긋한 사람이 된다.







며칠 전 언니의 주문으로 오랜만에 가지볶음을 만들었다. 이제는 익숙해져 처음과 같은 감동은 없지만 언니는 가지볶음을 앞에 두고 아빠가 좋아했던 첫날처럼 좋아해 준다. 그리고 옛날의 아빠처럼 자주자주 만들어 줄 것을 주문한다.


추억이 담긴 음식은 소중한 이와 함께했던 시간 속으로 데려가 준다.  새로운 음식에 대한 호기심은 여전하지만 그것은 한 번의 경험으로 충분하다. 어쩌면 또 다른 추억을 남길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들은 시간이 지나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니까.


추억이 담긴 음식은  굳이 '맛'이라는 평가를 내릴 필요가 없다.


가지와의 재회
이전 12화 얼렁뚱땅 오븐 돌리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