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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타 Oct 07. 2023

얼렁뚱땅 오븐 돌리기

[추억 한 그릇] 따끈따끈 '갓 구운 빵'


"요리책을 왜 사서 보는지 모르겠어. 블로그에 레시피가 차고 넘치는데.."

종이책을 선호하고 밑줄을 긋거나 모서리를 접어가며 문장 수집하는 것을 좋아할 정도로 글자 자체에 애정도가 큰 반면에, 실용서를 실용서답게 활용하지 않을 거라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을 하던 때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한식, 중식을 넘어 이탈리아, 프랑스 요리책까지 탐독하게 되었다.


첫 요리책은 어느 유명 블로거의 요리책이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반값이상 할인한다는 문구를 보고 5,000원+@의 금액은 작가와 출판사의 노고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수준이기에 '무료 배포나 다름없다'며 굳이 볼 필요가 없다던 요리책을 주문하게 된 것이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내가 몰랐던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나는 가끔씩 어떤 일에 강박적으로 몰입하는 때가 있는데 그런 경우 정작 중요한 일상을 후순위로 미뤄두는 일들이 생긴다. 이 시기에도 나에게는 세상 어느 것보다 요리책을 제대로 활용해야 한다는 강박이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던 것 같다. 실용서를 실용서답게 활용해야 한다는 강박은 레시피를 모두 실습해 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이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나친 강박과 꾸준한 실행 사이에 연계성은 전. 혀. 없다.


그리고 벽돌 깨듯 하나씩 실행에 옮겼다. 아버지에게 반값 할인으로 요리책을 사서 만들었노라고, 아빠는 "칼라 사진이 들어간 책 값이 그렇게 저렴하다니!" 하시며 함께 기뻐해주셨다.







"베이킹을 집에서 하고 싶진 않아. 나는 빵보다 밥이 좋아."라고 단언했던 시절도 있었다.


언니는 홈베이킹에 대한 로망이 있었지만 나는 힘든 시간을 들여 굳이(!) 베이킹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 시간에 차라리 식사가 되는 요리를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랬던 나는 어느 날부턴가 빵을 굽기 시작했다. 언니가 리퍼제품으로 할인을 받을 수 있다며 미니 오븐을 주문한 것이다. (할인행사가 아니었으면 요리책을 구매하거나 오븐으로 베이킹을 구울 일도 없었겠다 싶은 우리 집이다.) 마침 요리책에 관심이 꽂혀 있던 나는 제법 근사해 보이는 디저트 레시피가 실린 요리책을 한 권 주문했다.


첫 시작은 핫케이크가루에 계란을 하나씩 넣어 만든 매우 손쉬운 레시피의 '계란빵'이었다. 계란빵은 특별한 계량이나 재료가 필요하지 않은 데다 맛까지 보장된 메뉴였다. (베이킹이라고 하기엔 밀키트에 가까운 실습이다.) 머핀틀에 제법 넉넉한 양을 구웠는데 식구들이 하나씩 집어 먹다 보니 금방 사라졌다.


그 뒤로 나는 이런저런 레시피들을 검색하며 오븐을 돌리기 시작했다. 식빵처럼 아주 평범한 식사빵에서부터 쉽게 구울 수 있는 구움 과자, 쿠키, 파운드케이크. 조금 자신감이 붙은 이후로는 반죽이 필요 없는 노니드 빵과 발효종을 키워야 하는 빵 등. 정식으로 배운 베이킹이 아니기에 일관성 없는 빵들이 줄줄이 탄생했지만 아버지는 이제 나가서 빵 사 먹을 일 없겠다며 매우 기뻐하셨다.


아빠식 표현은 이러하다. "집에서 만든 게 진짜야!"라든가 "우리 00가 만든 게 진짜야!"


아버지는 객관적인 맛과는 상관없이 집에서 손수 만들어 먹는 것에 대한 정성과 노고를 아주 많이 높이 평가하는 분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칭찬은 늘 극찬이 되고 항상 최상급을 이용한 문장으로 표현된다.







크고 작게 엉뚱한 빵들을 생산(?)하면서 아빠가 의무감으로 빵을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마음 반, 밀가루 음식을 줄여야겠다는 마음 반으로 빵 생산을 멈춘 지 며칠이 지났을 무렵,


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나를 쓱 쳐다보시며 아버지가 물으셨다.


"요즘은 왜 빵 안 구워?"


아빠는 새벽녘, 출출함을 달래기 위해 두 개씩 오븐에서 꺼내먹는 재미가 있었는데 요즘은 빵 생산이 중단되었는지 궁금해하신다.



오븐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매일 다른 빵들을 구웠다. 베이킹 책에 나온 레시피들로 최대한 많은 종류의 빵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배운 경험이 없기에 대체로 내가 생산한 빵들은 책에 나온 사진과는 다른 얼렁뚱땅 모양인 빵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빠는 내가 만든 요리가 아무리 형편없더라도 맛있는 척 먹어주실 분이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실력으로 만든 빵을 아빠에게 억지로 먹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마음의 부담감에 빵 생산을 중단했는데 나의 본심과는 다르게 아빠는 진심으로 텅 빈 오븐을 아쉬워하고 계셨다.


나는 요리책 실습을 멈추고 특별한 기교가 필요 없이도 맛있게 구울 수 있는 레시피를 찾아 다시 오븐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요리 수업이 종강하고 얼렁뚱땅 빵을 구웠던 시간들이 소환되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구운 빵을 가족들과 맛보고 싶다는 생각에 베이킹 수업을 등록했다. 엉터리 제빵경력이나마 다년간 오븐을 돌린 경험으로 문화센터에서의 수업이 싱겁고 수월하게 흘러가는 듯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계량보다는 수작업이 중요한 메뉴들이라 다음 수업이 기대되었다. 스콘, 만주, 식빵, 마들렌, 파운드케이크, 롤케이크, 고구마케이크까지.


완성된 빵을 포장해서 집으로 퇴근하는 그때의 그 기분은 또 다른 설렘을 안겨주었다. 처음 오븐을 돌리며 빵을 구워냈을 때의 만족감과는 다르게 정말 제대로 구워진 빵을 가족들에게 맛 보일 수 있다는 뿌듯함으로 신이 나던 시간이었다. 우리는 늦은 시간 맛있게 빵을 나눠먹고 다음 주에 완성될 또 다른 빵들을 기대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아빠는 얼렁뚱땅 구웠던 나의 보잘것없는 빵을 더 좋아해 주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다. 지금에서야 아버지 입장에서는 내가 이미 완성된 빵을 집으로 가지고 퇴근하는 것이 사 온 빵을 먹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집 안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갓 구운 빵 냄새, 잠이 오지 않는 새벽녘 오븐을 열면 기대하고 있는 먹을거리가 있다는 풍족함이 아버지에겐 더 큰 추억으로 남아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아빠와 함께 먹었던 구움 과자들을 다시 한번 만들어 보아야겠다.



베이킹 수업의 마들렌과 유자파운드케이크
얼렁뚱땅 구워냈던 미니호두파이와 주키니브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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