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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타 Oct 12. 2023

기억은 다시 쓰인다.

맛있으니까 맛있는 줄로만 알았지.

좋아하던 이솝우화는 '시골쥐와 도시쥐', 그림동화 중에는 '헨젤과 그레텔', 만화영화는 '빨간 머리 앤'을 좋아했다.


시골쥐가 먹는 옥수수와 감자, 도시쥐가 좋아하는 케이크, 헨젤과 그레텔을 유혹하는 과자로 만든 집, 빨간 머리 앤에서 등장하는 초콜릿 상자와 아이스크림 등 다양한 요리와 디저트가 그려진 그림을 정말 사랑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마니아적으로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요리 영화를 즐겨 찾는 이유도 같은 이유다.


내 소유의 사진기가 생긴 이후로 귀차니즘을 무릅쓰고 사진을 찍는 이유도, 휴대폰이 통화 기능보다 사진기로 훨씬 효용가치가 있는 이유도 시시콜콜한 요리 사진들을 남기기 위함이다. 내가 찍은 사진엔 함께 시간을 보냈던 인물들은 생략되고 '함께 먹은' 요리만 기록되어 남는다. 사진만 보아도 누구와 함께 먹은 음식인지 기억해 낼 수 있다.






누군가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내어 먹을거리를 만들어 주었다면 솜씨와는 상관없이 음식이라는 단어보다는 <요리>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싶어진다. 내게 <요리>라는 단어는 시간과 정성이 담긴, 더 깊이 있는 의미의 단어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평범한 먹을거리를 통칭해서 음식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그럴듯하게 차려진 음식을 요리라는 단어로 표현하지만 나에게 음식의 모양새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차린 소박한 한 끼를 '근사한 예술'이라고 표현해 준 아빠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돈벌이를 시작하면서 갑자기 '먹는 것', 보다 솔직하게 표현하면 <먹고사는 것>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먹는다는 '행위'자체가 생존의 본능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한 것이다. 먹고 싶지 않아도 끼니를 의무적으로 때워야 하고 결이 맞지 않은 사람과도 제법 결이 맞는 척하며 밥 숟가락을 들어야 한다. 때로는 이성을 접어두고, 때로는 그날의 감정을 접어 놓아야 한다. 의미 없는 대화에 밥알은 모래 같고 배불리 먹어도 입맛이 없고 허기가 졌다. 온기를 잃은 마음의 허기였다. 맛집이라고 소문난 곳에서 가장 맛없는 식사를 남긴다. 머릿속에 다른 것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무엇을 먹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자연스레 맛있는 음식을 '잘'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생존의 본능, 그 이상을 넘어선 의미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어느 날 문득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잘' 먹고 싶다는 말에 담긴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때때로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에게 '잘' 먹는다는 것의 본질은 '음식'에 있지 않고 '사람'에 있다는 것을. '어떤 이와 함께 하는가'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음을. 요리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정성처럼, 함께 먹는 행위에도 자연스럽게 시간과 정성이라는 것이 따른다는 것을.







이 모든 시작은 '아빠'로부터 출발한다.


엄마를 대신해 바쁜 시간을 쪼개 도시락과 간식을 챙겨주던 아빠.

한여름엔 시원하게 얼린 이온음료와 물병을 도시락 가방에 넣어주던 아빠.

날씨가 제법 쌀쌀해질 무렵엔 그날 끓인 보리차를 한 김 식혀 보온병에 준비해 주던 아빠.


아빠가 만들어 준 식도락에 대한 기억은 따뜻했고, 긴 시간 나의 일상을 촘촘히 채워 주었다.


내 손으로 직접 음식을 만들 만큼 철이 든 이후에서야 아빠가 부엌에서 도시락 준비를 하던 시간들을 기억해 낸다. 퇴근길, 식당에 들러 가족과 먹을 안주거리를 포장해 오던 날이 되어서야 두 손 무겁게 요리를 포장해 오던 아빠의 퇴근길은 어땠을까 새삼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맛있는 음식은 맛있으니까 맛있는 줄만 알았던 때가 있었지. 돌아보면, 나에게 맛있는 음식이란 <소중한 사람>과 지금, 여기에서 함께 나누어 먹던 소소한 일상과 그 기억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자연스럽게 쌓인 기억의 시작이 아빠이기에 이 모든 기록  역시 아빠로부터 출발한다.


아빠가 떠난 지금, 어쩌면 진정한 독립의 시작이다.

긴 시간 함께 먹고 마시고 나눌 새로운 인연들로 나의 식도락 일상을 다시 채워 나가야 한다.



우리들의 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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