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물건은 늘 윤이 난다.
달력을 입은 새 책, 세월을 담은 헌 자동차
새 학기가 시작될 때 학교에서는 교과서를 나누어 주었다. 책가방 안에서 새 책과 헌 책이 함께 뒹구는 통에 몸은 무겁지만 새 책을 받은 기쁨에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새 학기 책을 가지런히 내 방 책상 위에 올려둔다. 아빠는 모아두었던 지난 달력을 가져와 책을 한 권 한 권 곱게 포장해 주신다. 나는 옆에 앉아 책 표지를 포장하는 아빠의 손놀림을 유심히 관찰한다. 학년이 올라가 직접 포장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고대하면서. 새 옷을 입은 책은 반짝반짝 윤이 난다. 정성스럽게 포장한 책들을 책꽂이에 곱게 꽂아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설레는 마음으로 꺼내보곤 했다.
교과서를 포장해 주던 아버지는 당신이 만난 모든 책에 새 옷을 입히셨다. 대개는 달력을 뒤집어 흰 뒷면을 바탕으로 책을 포장하셨지만 가끔씩 내가 사다 놓은 크라프트지를 발견하시곤 그 어느 때보다 반가워하셨다. 어디에 쓰려고? 물으면 책이나 수첩을 포장하려 한다는 일상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아빠가 어릴 땐 책이 얼마나 귀했는지..라는 말씀과 책은 여러 번 반복해서 보아야 하는 것이기에 쉽게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덧붙이신다. 정작 당신의 책을 포장할 땐, 내 어릴 적 교과서를 포장할 때처럼 모서리 각을 잡을 만큼 정성을 들이진 않으셨다. 우리들 책에는 풀을 입혀 꼼꼼히 다리미 한 옷을, 아빠의 책에는 빨랫줄에 말린 편안한 옷을 입히신 것처럼 무심한 듯 옷을 입히셨다.
작게는 소소한 학용품부터 아빠가 긴 시간 몰고 다녔던 자동차까지. 아빠의 손을 거쳐간 물건들은 수십 년이 지나도 새로 산 물건처럼 상처 하나 없이 윤이 난다. 물건도 생명이 있는 것처럼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아버지. 당연히 물건을 쉽게 바꾸는 일도 없으셨던 아빠. 그런 아빠이기에 내가 초등학교 입학 전에 구매한 자동차를 15년 쓸고 닦으시며 상처 없이 몰고 다니신 것은 어찌 보면 참 당연한 일이었다. 겉모습만은 어느 고급승용차 못지않게 반짝반짝했던 우리들의 자동차는 추운 겨울날 시동이 걸리지 않고 길거리에서 시동이 꺼지는 등 수명이 다해가는 모습을 여러 번 보였지만 아빠는 쉽게 포기하지 못하셨다. 또 하나의 자식처럼 그렇게 몇 년을 더 함께하고 나서야 아빠는 세월을 담은 자동차를 보내주고 새 자동차를 구입하셨다.
어른이 된 후 나는 가끔씩 그 자동차를 생각한다. 나의 꼬꼬마 시절과 사춘기 시절을 모두 함께 한 자동차, 아빠가 아침마다 학교에 바래다주고, 주말마다 맛있는 식당에 함께 들렀던, 가족처럼 긴 시간을 함께 보낸 자동차다. 반짝반짝 빛이 나던 모습으로 처음 만났던 날까지 기억나는 자동차. 우리 가족의 희로애락을 함께한 추억이 담긴, 이제는 노쇠한 자동차를 보내주기로 했을 때 아빠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렇게나 시간이 지나서야 궁금하다. 나는 아빠를 꼭 닮은 딸이니까 아빠도 내 마음 같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