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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타 Jul 03. 2024

캐럴이 흐르는 '크리스마스 카드'

아버지의 멜로디 카드

산타할아버지를 더 이상 믿게 되지 않았을 때에도 늘 크리스마스를 기다렸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도, 그 학교를 졸업할 때에도, 중학생이 되어서도. 그리고 대학생이 되었을 때까지도.


어쩌면 내가 가지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설렘은 여느 아이들과는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거리에서 팬시점도 흔히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었지만, 그때 그 시절에는 꽤나 흔했던 문구점에서 나는 늘 크리스마스 카드 고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문구점 앞에는 제법 넉넉한 장소에 늘 크리스마스 카드를 위한 공간이 마련되었다.

근처 음반가게나 쇼핑몰에서 흘러나오는 캐럴을 들으며 열심히 카드를 구경했다.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 카드는 아무런 글자도 적혀있지 않은, 완연히 깨끗한 새것의 모습으로 내게로 왔다.  바로 아빠가 사주신 '멜로디 카드'다. 당시 5000원이나 하던 멜로디 카드. 두께감 없이 날렵한 요즘 모습의 멜로디 카드와는 거리가 멀었다. 두꺼운 도화지를 접어서 만든, 제법 뚱뚱한 전구가 반짝이며 캐럴이 흘러나오던 카드였다. 지금 그 카드를 본다면 참 투박하다 했을 것이다.


그 멜로디 카드를 어떻게 사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와 함께 문구점에 들렀고, 크리스마스 카드를 구경했던 것, 멜로디 카드를 신기해하던 기억. 그리고 아버지가 언니와 나를 위해 카드를 하나씩 사주셨던 기억. 카드를 받아 든 우리만큼이나 빛나던 아버지의 표정. 그것이 전부다.



아버지는 그때까지 쉽게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물건을 발견(?)하면 기념 삼아 두 딸들에게 하나씩 사주시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땐 한 번도 가격이 비싸다거나 실용성이 떨어진다거나 하는 현실적인 의견을 덧붙이신 적 없었던 '평소엔 실용주의적이셨던' 아빠. 집에 와서 얼마나 그 카드를 애지중지 보관했던지. 아무리 조심스럽게 다루어도 종이로 된 카드를 세월의 힘을 입었고, 더 이상 캐럴을 불러주지 않았다.


몇 년 전 갑자기 카드를 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블로그에서 기념일마다 카드를 주고받는다는 부부의 글을 보고 어릴 때 감성이 되살아 난 것이다. 인터넷에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검색했다. 과연 어릴 때처럼 내 마음에 꼭 드는 카드를 발견할 수 있을까 다소 상기된 마음. 이제는 실용적인 취미가 아니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다소 현실주의자다운 면모를 갖춘 어른이 된지라 카드 몇 개를 두고 고심했다. 두 개의 카드를 주문했고 그중 하나가 바로 멜로디 카드였다. 어릴 때 아빠가 사 준 나의 멜로디카드와는 다르게 날씬한 모습이다. 어린 시절 나의 멜로디카드는 버튼을 눌러야 캐럴이 흘러나왔지만 내가 구매한 카드는 내부를 펼치면 캐럴이 흐른다. 연주소리도 어릴 때 듣던 캐럴보다 훨씬 고급스럽다.


몇 년 전 내가 구매한 멜로디카드의 가격은 만원쯤 했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어릴 때 사주신 멜로디카드가 5000 원이었다는 사실은 선명하다. 늘 가격에 대한 논평 없으신 아버지라 큰돈이라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세월이 흘러 카드 한 장에 만원이라는 생각에 망설이는 나를 보며 아버지가 사주신 멜로디카드가 얼마나 비싼 녀석이었는지 한발 뒤늦은 체감을 한다.


이제는 어른이 되어 누군가에게 선뜻 크리스마스 카드를 건넬 용기도 없다. 어릴 때의 순수함은 그런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덧붙여진다. 그땐 그냥 예쁜 카드를 보면 사고 싶었고, 그 카드를 꼭 좋아하는 친구에게 보내고 싶었고, 그 생각만이 중요했는데 어른이 되니 고작 카드 한 장 쓰는 것도 쉽지가 않다니..


오랜만에 마주한 크리스마스 카드를 한참 감상한 후, 글씨가 가지런한 언니에게 카드 쓰기를 종용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선사했다. 아빠에게 처음 보내는 크리스마스 카드가 아니었을까.


칠십이 넘은 아버지의 눈에 멜로디카드는 몹시도 신기하다. 정작 당신이 초등학생 딸들에게 멜로디카드라는 신문물(!)을 접하게 해 주셨다는 것은 기억을 못 하시는 듯했다. 그렇게 당신께서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셨는지 우리가 소환해 내어야만 "아빠가 그랬어?" 하며 반문하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첨언. "아빠가 너희들에게 꽤 잘해주긴 했구나...."라는 자화자찬의 말씀..



그날 이후로 멜로디 카드는 아버지 잠자리에 옆에 자리를 잡았고 아침저녁으로 카드의 캐럴이 울려 퍼졌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는 아버지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각자의 방에 있어도 아버지가 카드를 펼쳐서 다시 한번 감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카드를 펼쳐보는 것이, 캐럴이 아버지 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어찌나 좋던지. 아주 작은 일 하나로 얻게 된 너무나 큰 기쁨이었다.



몇 년이 지나니 멜로디 카드는 더 이상 캐럴을 부르지 않았다. 수명이 다한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쯤 아버지의 물건들이 모두 함께 수명을 다했는데 멜로디 카드도 그중 하나였던 것이다. 아버지 책상 위에 있던 멜로디카드는 다시 내가 보관하게 되었다. 더 이상 캐럴은 흐르지 않지만 아버지가 사주신 멜로디카드를 한참 동안 애지중지하던 어린 시절 내 모습과 나이 든 아버지의 모습이 함께 담겨 있는 소중한 카드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 주신 멜로디카드와 아버지를 생각하며 구매한 멜로디카드...

모두가 내 아버지가 추억으로 남겨준 멜로디카드..!





© anniespratt,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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