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쯤 되자, 학교에 도서실이 생겼다.이전에는 도서실이 있었던가 없었던가. 아무튼 내 기억속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종이로 된 도서카드를 나누어 주셨다. 지금처럼 전산화되거나 디지털화된 카드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이름을 적어 넣고, 책 제목과 빌려간 날짜, 반납한 날짜를 적어넣어야 하는 완전한 수동식 도서카드였다. (수작업 도서카드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일런지.)
도서카드를 받아든 순간, 나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도서카드의 빈칸을 최대한 많이 채우기 위해 매주 책을 빌릴 이유가 생긴 것이다. 그 이전에는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에도 없었던 도서실. 어쩌면 이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존재감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도서카드는 나에게 그렇게 중요한 의미가 되었고, 책을 빌릴 수 있는 요일이 되면 도서실에 가는 이유를 만들어 주었다.
단순히 카드의 빈칸를 채우기 위해서 책'만' 빌린 것은 아니었다. 빌린 책을 참 열심히 읽었다. 마음에 들지 않은 책을 만나도 반드시 완독해야 한다는 강박은 어릴 때부터 있었던 모양이다. 학교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아이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듯하다. 지금처럼 독서수행평가가 있거나, 책을 많이 읽은 기록을 남긴다고 표창을 하던 시대도 아니었는데 혼자만의 사투를 벌였던 셈이다.
도서카드의 한줄 한줄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채워 넣었는지 모른다. 이력서에 한 줄 한줄이 더해지는 느낌과 비슷했을까. 어쩌면 더 소중한 기쁨이었던 것도 같다. 아무 이유없이 순수하게 그 자체가 좋았기 때문이다.
긴 시간 잊고 있던 (도서카드에 대한) 혼자만의 추억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러브레터'라는 일본영화로 인해서였다. 도서실 책 뒤편에 꽂혀 있는 도서카드마다 자신의 이름을 채워넣는 독특한 성격의 소년. 그리고 소년과 함께 도서실 정리를 맡게 되는 동명이인의 소녀. 세월이 지나 소녀는 도서카드에 채워진 이름이 소년의 이름이 아니라 동명이인이었던 자신의 이름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 몽글몽글한 감성의 영화는 세월에 따라 더해진 나이만큼 다양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영화인데 '도서카드'라는 공통점 하나만으로도 나에게는 의미있는 영화로 기억된다.
세월 속으로 사라져버린 완연한 수작업 도서카드가 다시 부활한다면, 그때 나는 다시 도서카드의 빈란을 채우기 위해 내 소유의 책을 줄이고 도서관에 들를 일을 더 많이 만들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