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스몰 웨딩
내가 혹은 당신이 상상하기 힘든 부자들의 결혼이 있다면 그 반대의 결혼도 당연히 있다.
평일 퇴근 후 열리는 결혼식. 겨울의 결혼식. 평일은 당연히도 적은 하객에 소규모로 치를 수 있어 돈을 절약할 수 있고 겨울은 비수기라 많은 디스카운트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변덕 많은 겨울 날씨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불상사는 커플의 책임이다. 눈 폭풍이 몰려와 100명 예약자 중, 10명밖에 참석을 못해도 커플은 100명
참석자의 파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 웨딩을 강행하는 사람들.. 여러 이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첫 번째 이유는
저렴한 가격이다.
뉴욕에서 결혼 비용을 가장 낮출 수 있는 날은 겨울철 평일 결혼이다.
스몰웨딩 돈이 없기 때문이다.
스몰웨딩, 아무래도 뉴욕에서는 초기 이민자의 웨딩이 그러하다. 싸들고 온 돈이 많은 투자 이민자들이나
중동의 부호들 말고는 초기 이민자들의 결혼은 적은 가족에 저렴한 웨딩이 된다.
뉴욕 퀸즈의 엘머스트라는 지역에 있는 신부의 집을 찾아갈 때였다. 인구 밀집 지역으로 짐작할 수 있는 빽빽한 아파트 건물 숲을 지나고 그중에서도 후미진 곳의 건물 주소를 확인했다. 주소는 일단 맞지만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건물 주변을 맴돌았다. 아무리 땅 값 비싼 뉴욕이라 해도 이렇게 주차 자리 찾기 힘든 경우는 흔치 않다. 할 수 없이 차를 멀찌감치 대고, 장비를 챙겨 신부집을 향해 걷는데 조명 장비에 카메라 가방을 둘러 맨 사진사는 벌써 지쳐 있는 모습이었다. 역시 웨딩은 체력이다.
신부의 아파트 건물 앞에서 신부와 통화 후, 신부의 남동생이 나와 촬영 스탭을 인도해 주었다.
보안 때문인지
이중으로 된 현관을 지나 엘리베이터 없는 5층의 신부집에 입성했다.
유난히 긴 시간이 흐른 듯 느껴졌다. 한 겨울에 땀을 뻘뻘 흘리는 사진사를 보니 왠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늘 하던 대로 집안에서 비디오 찍을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집안을 살피는데 따로 살펴볼 것이 없었다. 현관을 지나자마자 보였던 좁은 거실에 몇몇 가족이 모여 있고 더 좁은 한 칸짜리 방에는 이층 침대가 방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신부와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보니, 신부는 방바닥에 앉아 손수 화장을 하고 있었고 벽에 붙어 있는 기다랗고 색 바랜 거울이 신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 앞 바닥에 놓인 화장품을 보고 있자니 혹시라도 화장품이 넘어질까 봐 불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솔직히 촬영을 어떻게 시작할지 난감한 마음이 들어 옆의 사진사를 쳐다보니 그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사진사는 좀 전 보다 땀을 더 흘리고 있었는데 나는 이번에는 웃을 수 없었다.
신부는 거울을 통해 우리를 쳐다보며 어쩌면 방안의 이질적인 공기를 의식해서 인지 연신 웃으며 화장을 빨리 끝내겠다고 했다. 거실에서는 국적을 알기 힘든 외국어가 쉴 새 없이 들렸다. 누군가는 통화를 하는 거 같고 누군가는 옆에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 같은데.. 내용은 예측 불가였다. 나는 누구이고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신부의 준비 과정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신부가 촬영자를 집으로 불렀다면 그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아님 아무 생각 없었거나....
바닥에 뒹굴듯이 있는 화장품들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내용물이 많지 않아 속이 들여 다 보이는 작은 병들.
털이 많이 빠져 보이는 브러시 그리고 신부를 한층 못 생기게 만들어 보이는 세월 맞은 거울.
천장에서 물이 샌 적이 있었는지 한쪽 벽의 페인트가 부풀어 올라 있었고 페인트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가 있었다. 거무튀튀한 벽은 내 기억을 되살려 주기까지 했다. 나도 이런 방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다.
뉴욕에도 반지하 당연히 있다. 심지어 완전 지하도 있다.
나는 누군가는 더럽다고 생각할지 모를 자국들을 모두 화면에 담았다. 신부의 뒷 배경으로 떨어져 나간 페인트 조각들이 있었고.. 옷장 같은 곳에 숨기다가 숨기다가 포기한 물건들이 자리한 침대의 어수선함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찍었다.
신부가 10년쯤 후에, 웨딩 비디오를 보며, "맞아 저때는 저렇게 살았었지.. "하며 웃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자랑은 아니라도 숨길 필요까지는 없었던 이민 초짜 시절의 집.
신부만을 찍을 때는 모든 샷이 클로즈 업(Close up) 또는 익스트림 클로즈 업(Extreme Close up)이었다.
신부 자신도 모르는 아름다움을 찾아주고 싶었다. 건강미 넘치는 피부, 짙은 눈썹에 무척 가까이 자리 한 갈색 눈동자, 유난히 가는 윗입술, 수줍어 보이지만 자주 보이는 미소.
다닥다닥 붙어서 촬영했다는 표현밖에 할 수 없는 촬영을 마치고 거실로 나왔다.
하지만 웨딩드레스를 쫙 펼치고 찍을 만한 공간은 그곳에도 없었다. 드레스를 펼치면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이쪽저쪽으로 아무리 앵글을 잡아 보아도 아기 용품들, 펴면 침대가 되는 색 바랜 소파, 생뚱맞은 운동기구를
피할 수 없었다.
결국에는 집 밖으로 나와 촬영을 하게 됐다.
1월 중순, 바람이 아주 차가운 날이었다. 더구나 신부의 드레스는 팔뚝 조차 없는
슬리브레스 (Sleeveless Wedding dress)였다.
촬영을 신속하게 진행하려고 노력했고, 신부는 이를 악물고 웃음을 보였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눈이 오지 않은 날씨에 감사했다.
눈이 왔다면 헤어와 드레스가 젖을까 봐, 야외에서의 촬영도 불가능했다.
신부의 가족은 영어가 서투른 신부의 부모, 좀 전에 우리를 안내해 주었던 신부의 남동생 그리고 한 살이 안돼어 보이는 아기가 있었다. 신부의 아기라고 지레짐작했는데 부모가 낳은 늦둥이였다.
그 집의 유일한 미국 시민이었다. 신부의 가족은 10여 년 전쯤 인도에서 이민을 온 사람들이었다.
결혼식은 신부가 예전부터 다녔다는 교회에서 진행됐다. 인도 전통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을까? 짐작을 하고
있었는데 신랑, 신부 가족은 모두가 크리스천이었다.
교회 예식은 별 특이점이 없다가 끝부분에 신랑, 신부가 서로에게 우유를 먹여주는 순서가 있었다. 원래 인도 웨딩에서는 밀크 세리머니(Milk Ceremony)라고 해서 신부의 부모가 신랑, 신부의 손이나 발을 우유로 닦아주며 새 출발을 알리는 순서가 있는데 조금은 다르게 진행됐다. 혹시 이것도 비용절감?
교회에서 예식이 끝나고 아스토리아의 한 연회장으로 갔다. 1층은 상가가 자리를 하고 있고 2층과 3층이 연회장인 특이한 구조로 된 건물이었다. 연회장 문 옆으로는 뉴욕시 위생검사 결과 C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C는 최하 등급이다.
최하 등급인데도 자랑스럽게 입구에 스티커를 붙여 놓은 이유는 그게 뉴욕시 법이기 때문이다.
파티 장소로 들어가 보니 천장에는 물 샌 흔적들이 보였다. 물 흐른 자국에는 곰팡이가 피어있는 듯 보였다.
눈 가리고 아웅 하듯, 커튼으로 가려 놓기는 했는데 그 커튼마저도 습기 찬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식사 서비스를 해야 할 웨이터나 웨이트리스의 옷도 청결하지 않았다. 며칠이나 입었는지 사이즈가 맞지 않는 유니폼은 꾀죄죄했다. 어떤 유니폼은 스파게티 소스 같은 게 묻어 있었고,
모든 이의 바지 밑단은 기름기가
흐르고 있었다.
솔직히 이런 종류의 연회장이 있다는 걸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나름 커뮤니티 내에서는 유명한 곳이었다. 1년에 치르는 웨딩 개수도 상당히 많았고 2층과 3층으로 나누어진
연회장은 하루에 4개의 행사도 진행할 수 있었다.
나는 모르던 그들만의 리그가 여기도 있었다.
7시에 시작하려던 파티는, 7시에도 오지 않는 하객들 때문에 시작할 수 없었다. 7시가 넘고 7시 30분쯤 돼서야 몰려오던 하객들. 모두가 일을 끝마치고 오느라 늦은 거였다.
파티는 8시가 넘어서 시작됐고 춤추고 노는 시간도 잠시 바로 뷔페식 디너가 시작됐다. 모두가 기다리던 식사 시간. 스텝들도 배가 고프긴 마찬가지였다. 음악 담당자인 백인 디제이가 촬영팀에게 다가왔다. 자신은
이곳에서 음식을 먹고 일주일을 설사로 고생 한 경험이 있다며 멀지 않은 맥도널드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만약 신랑이나 신부가 찾으면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하고 총총히 사라졌다.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우리 촬영팀은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때 신부의 아버지가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어설픈 영어로 식사를 권하다가는 나와 사진사의 팔을 잡아끌어 길게 늘어 선 뷔페 줄 맨 앞에 쑤셔 넣어 주었다.
다른 하객들 보기가 미안해, 눈치 봐가며 몇 가지 음식을 접시에 담아, 우리를 위해 만들어 준 테이블로 갔다. 몇몇 인도 전통 음식들도 있었고 음식은 맛이 있었다. 배가 좀 불러오자 신부 아버지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다. 따로 테이블을 만들어 주기까지 하고, 같은 음식을 대접해 준 마음.
음식 먹는 게 두려웠던 좀 전까지가 부끄러웠다.
조용히 진행된 파티는 별로 흥겹지 않았고 내일 출근을 걱정하는 하객들은 술도 마시지 않았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작별 인사를 하며 커플에게 신혼여행을 어디로 가냐고 물으니 축의금을 계산해보고 정하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의외의 대답이 당황스러워 아무 말 못 하다가 과장된 웃음을 보이며
장비 가방을 챙겨 그곳을 떠났다.
초등학교 나이 때쯤, 부모를 쫓아 미국에 오게 된 이들. 이민 1.5세라 불리는 사람들.
나는 그들이 정말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영어 한마디 못해 학교에서 공공연한 따돌림을 받으며
성장하고, 드디어 자신들의 가족을 꾸미게 된 사람들.
가난의 되물림이라는 부정적 이야기보다는 미국이 아직도 기회의 나라라고 말해주고 싶다.
뉴욕에서 숱하게 보아 온 초등학생 아이들이 부모 손을 붙잡고 관공서나 은행에 가서, 부모의 통역을 해주거나, 전화로 해야 할 모든 일을 도맡았던 아이들. 이제는 영어 못하는 부모의 짐을 벗고....
새 출발을 하는 그들의 앞길에 꽃길이 열리라고 기원한다
그들이 돼야만 알 수 있는 그들만의 리그. 나의 배움은 현재 진행형이다.
적나라하게 카메라에 담았던 신부가 살던 집, 내부의 모습들..
지저분 한 걸 찍었다는 신부의 불만 때문에 편집을 두 번이나 다시 해야 했다.
감독의 마음을 이렇게 몰라주네요.
사진은 글의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