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주말의 비가 전혀 반갑지 않은 날이었다. 아이를 플러싱 YMCA에 내려주고 바삐 나오고 있었다. 주차요금인 동전 하나 아끼려고 열 살 딸아이 손 잡고 건물로 뛰어들었다가 뛰쳐나오는 게 토요일마다 일상이다. 주말이지만 남들이 느끼는 여유는 없다. 홧김에 남의 세탁소 뛰쳐나와 시작한 세탁소를 힘들다고 하소연하며 7년째 버티고 있다. 와이프는 세탁소로 먼저 갔고,
토요일 오전 딸아이의 스케줄은 내가 챙긴다. 수영이 끝나고 토요 학교까지 데려다주면 내 임무는 끝난다.
좀처럼 적응 안 되는 아이의 매니저 노릇, 아이가 하나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제법 내리는 비 때문인지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커피 생각을 하며 건물을 나와 차 쪽으로 뛰고 있었다. 설마 주차 딱지가 붙어 있지는 않겠지... 차 쪽으로 고개를 내 빼고 뛰는데 떨어져 있는 지갑이 보인다. 루이뷔통 지갑이 흐르는 빗물을 버티고 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본다. 우산에 얼굴 가린 사람들, 아이와 실랑이하는 부모, 비에 쫓기는 사람들. 나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다. 나는 지갑을 빠르게 주워 차로 뛰어오른다. 가슴이 뛴다. YMCA 건물을 살핀다. 보안용 카메라가 몇 개 보인다. 하지만 길 가장자리에서 빗물을 버티던 지갑이 카메라에 잡혔을 리 없다. 더구나 나의 우산은 등 뒤를 가려주고 있었다. 다른 이는 내가 지갑을 주웠는지, 버렸는지 알 수 없다. 지갑을 YMCA에 맡겨야 할까? 하지만 지갑 주인이 YMCA에 다니는지 알 수가 없다. 일단 차의 시동을 걸고 운전을 시작한다. 지갑을 열어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가슴이 떨려 운전에 집중이 안 된다. 눈에 띄는 세븐 일레븐의 주차장으로 들어선다. 비가 좀 전보다 거세졌다. 차창을 때리는 비에 아무것도 안 보인다. 조여오던 가슴에 여유가 생긴다. 옆자리 발판에 던져 놓았던 지갑을 집어 든다. 화장지로 지갑의 물기를 닦아낸다. 물에 젖어 뻑뻑한 지퍼를 연다. 루이뷔통이라 그린 지, 지갑 안은 젖지 않았다. 한쪽 귀퉁이가 젖어있을 뿐이다. 현금을 꺼내 본다. 십 불, 이십 불, 오십 불..., 구십 불이 들어있다. 일 불 짜리는 없다. 지갑의 틈틈을 젖힌다. YMCA의 회원증이 있다. 회원증에는 생년월일이 없다. 이름은 단양. 다른 신분증은 눈에 안 띈다. 흔해 빠진 크레디트 카드도 없다. 지갑 안 지퍼를 연다. 옛날 사진이 한 장 있다. 십 대 후반으로 보이기도 하고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기도 하는 단발머리의 여자. 한눈에 봐도 아름다운 여자다. 목 주위에 작은 레이스가 달린 감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다. 원피스는 무릎 바로 위에 멈춰있다. 어느 호텔이나 식당의 로비 같은 배경. 사진의 뒷면을 본다. 1988년 4월 21일 향항 이라고 한자로 쓰여있다. 홍콩이다. 홍콩 사람이다. 사진을 돌려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본다. 눈썹까지 내려진 앞머리, 짙은 눈썹, 마음을 숨길 수 없어 보이는 커다란 눈, 똑똑히 솟아있는 코, 씹는 데 적합해 보이지 않는 작은 입. 1988년 4월..., 나는 대학교 신입생이었다. 처음 맞을 오월 축제의 기대로 가슴 설레던 때였다. 사진 속 주인공은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때 홍콩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플러싱 YMCA에 다니고 있다. 볼수록 아름다운 여자라는 생각이 든다. 나보다 연상인가? 연하인가? 호기심은 커져만 간다.
사진, YMCA 회원증, 구십 불. 나는 지갑의 주인을 찾기로 했다. 이 정도 미모의 여자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다.
손님이 맡긴 옷들을 분리하고 후앙에게는 분리한 옷들을 세탁함으로 옮기라고 한다. 세군도에게는 다림기 좀 살살 다루라고 지시한다. 다림질이야 프레스만 내리면 기계가 알아서 하는데 괜한 힘을 써서 기계를 망가뜨린다. 제 고집이 있어 잔소리를 눈치 보며 해야 하는 내 처지가 우습지만,
라이벌 세탁소에서 모셔 오다시피 데려와서 벌써 5년째다.
일부러 인상 쓴 얼굴로 두 외국인을 쳐다보고는 뒷문으로 빠져나온다.
둘이 나누는 스패니쉬 대화, 뒤이어 길게 이어지는 웃음소리가 뒷 통수를 때린다.
익숙한 사장 뒷 담화에 뒤도 안 돌아본다.
주차장의 차에 오른다. 미러로 뒤쪽을 보고 고개 돌려 좌우를 살핀다. 가슴팍 주머니에서 지갑을 빼 든다. 내 운전면허증 뒤에서 그녀의 사진을 조심스레 꺼낸다. 혹시 사진이 다칠까 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오래된 사진이라 두 모서리는 이미 닳아 있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본다. 오늘도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그녀.
그녀와 어디론가 떠난다. 그곳이 홍콩의 어느 골목이 되기도 하고 명동, 신촌이 되기도 한다. 나는 열아홉 살, 나는 한국말을 하고 그녀도 한국말을 한다. 내가 영어를 하면 그녀도 영어를 한다. 그녀는 중국 말을 안 한다. 우리는 80년대 미국 팝송을 듣기 좋아한다. 카세트테이프가 들어가는 워크맨을 갖고 다니다 마음 내킬 때 음악을 듣는다. 하지만 둘이 길을 걷거나 대화를 나눌 때도 어디선가 음악은 들려온다. 예전에 들었던 음악이 끊이질 않는다. 그녀와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음악 얘기를 나눈다. 마돈나의 남성 편력을 화제에 올린다. 등려군이 죽기 전 1988년이지만 등려군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 시간의 흐름이 무의미한 공간이다. 육체의 피곤도 의식하지 못한다. 그저 나와 그녀가 존재할 뿐이다. 우리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와의 대화가 많아질수록 현실의 나는 과묵해진다.
시간만 나면 들여다보던 핸드폰 대신, 습관처럼 그녀의 사진을 꺼내 본다. 오늘은 홍콩의 뒷골목을 둘러볼 거다. 쇼핑몰들이 즐비한 침사추이 쪽보다는 샴슈이포가 정겹다. 80년대의 분위기가 남아 있는 곳이다. 늘어진 흰색 러닝셔츠 차림의 아저씨를 흔히 볼 수 있는 곳. 좁고 어디서 끝날지 모를 골목을 느리게 걷는다. 가게가 즐비하지만 파는 물건은 거기서 거기다. 헬로키티 상품이 있고 일본 만화책, 머리핀, 작은 손지갑 같은 것들만 진열되어 있다. 어차피 파는 물건에는 관심이 없다. 그녀의 손을 아직 못 잡아 봤다. 장소 이동을 하며 자연스럽게 잡아 보려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지난밤 그녀의 침실에서 그녀의 모든 것을 가졌지만, 손을 잡아 보지 못했다. 그녀의 수줍은 가슴, 알맞게 솟아있는 아랫배, 배꼽에서부터의 솜털이 선을 만들어 그녀의 비밀스러운 곳으로 연결된다. 나는 입술로 그 선의 처음에서 끝으로 따른다. 그녀의 끝. 나의 격한 움직임에 반응하는 그녀의 목소리. 가느다란 팔목이 내 귀를 간질인다. 나는 아직 그녀의 손을 잡아 보지 못했다. 손을 만지며 부드러운 키스를 건네고 싶은데 그런 상상이 안 된다. 격한 정사를 몇 번이고 치렀지만, 옷에 가려진 그녀 몸을 구석구석 알고 있지만, 그녀의 손이 어떻게 생겼는지 사는 곳이 어딘지 모른다. 그녀는 내게 와 줬지만 나는 찾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녀의 지갑을 주운 지 사 일째이다. 혼자 있을 때면 나타나는 그녀의 환상, 그녀에 익숙해지는 나. 가진 적 없는 것을 잃을까 봐 상실감을 느낀다. 루이뷔통은 내 차의 의자 밑에 감추어져 있다. 패튼 가죽에 지퍼로 둘러진 장지갑. 반듯하고 정교한 문양이 현실적이지 않다. 빛을 반사시키는 진한 자주색이 보석 상자를 연상시킨다. 나는 사진 속 그녀를 찾아 어쩔 셈인가? 그냥 YMCA의 사무실에 지갑을 맡겨야 할까? 현실보다 생생한 상상이 당황스럽다.
마누라와 아이는 자겠다고 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잘 자라고 배웅한다. 쿠션으로 머리 받침을 만들고 소파에 편히 눕는다. 아이패드에 헤드폰을 낀다. 유튜브에 접속해 키워드로 추억의 영화 음악을 입력한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주제곡이 흐른다. 오드리 헵번이 비상계단 가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 준다. 나는 사진 속 그녀와 연세대 앞 독수리 다방 앞을 지난다. 왠지 촌스러워 보이는 다방을 지나 왼쪽 골목으로 방향을 잡는다. 얼마 안 걸어, 지하의 에스프리 카페로 들어간다. 자욱한 담배 연기가 안개막을 치고 있다.. 얕은 칸막이 뒤로 보이는 손님은 모두가 연인이다. 자리를 잡아 그녀와 앉는다. 파르페 두 잔을 주문한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주문한 파르페가 테이블에 놓인다. 먹기 아깝도록 이쁜 체리를 보고 그녀의 눈을 본다. 깊은 눈이다. 빨간 입술이 체리보다 탐스럽다. 갑자기 끼고 있던 헤드폰이 귀에서 낚아 채인다. 놀라서 눈을 뜬다. 마누라가 나를 내려 다 보고 있다. 짧은 외침, 들어가 자!
헤드폰에 연결된 아이패드가 소파에서 떨어진다.
지난 칠 일간 사진 속 그녀만을 생각했다. 차를 주차하고 동전을 시간 한도까지 채워 넣었다. 서두르지 않는다. 딸아이에게 조심하라고 타이르고 탈의실 앞에서 헤어진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계단을 천천히 내려온다. 언제나 북적거리는 메인 홀을 둘러본다. 중국말, 스패니쉬, 한국말이 동시에 들린다. 누구 목소리가 큰지 벌리는 경연장 같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 생소하다. 사람들 목소리에 집중한다. 소음 속에서 단양이라는 단어를 찾는다. 삼십 년 후의 그녀와는 거리감 있어 보이는 중국 여인네들을 뒤로하고 수영장으로 간다. 불쾌한 소독약 냄새가 먼저 반긴다. 딸아이를 찾아본다. 한눈에 찾을 수 없다. 객석 쪽으로 눈을 돌려 띄엄띄엄 앉아있는 아이들 엄마를 살핀다. 모두가 고개 숙여 전화기를 보고 있다. 이곳에도 내가 찾고 있는 얼굴은 없다. 중국어 소음이 튀어나온다. 누군가 이어폰 없이 비디오를 본다. 주변의 시선이 그녀를 향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학년 아이들이 있는 지하 수영장으로 간다. 여섯, 일곱 살로 보이는 아이들이 두 그룹으로 나뉘어 헤엄을 친다. 유리창 건너 아이들 얼굴에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그들을 바라보는 엄마들. 동물원 수족관의 느낌이랄까..., 조금은 우스운 모습이다. 유리창 밖 수족관 누가 누구를 구경하는 걸까? 몇 안 되는 동양 엄마의 얼굴을 본다. 주변에 나 이외의 남자는 한 명도 없다. 작은 수영장이라 서로의 자식들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을 순 없었다. 좁은 계단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북적거리는 메인 홀로 되돌아와 시계를 본다. 차로 가서 동전을 미터기에 넣는다. 딸아이의 수영이 끝나려면 아직도 한 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 딸아이의 수영장으로 되돌아간다. 객석에 앉아 아이를 찾는다. 이 아이 저 아이 사이에서 딸아이가 보인다. 무의미해 보이는 동작으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수영을 한다. 몇 주 만에 수영하는 모습을 본 건데 별로 나아진 건 없어 보인다. 보통은 아이를 내려주고 던킨으로 가서 신문을 읽던 인터넷 검색을 하던 소일거리를 하는데 지금 뭐 하는 건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해본다. 딸아이를 보면서 고개 돌려 주변의 여자들을 본다. 어정쩡한 자리에 앉아있어 앞쪽의 여자들은 뒤통수 밖에 안 보이고 뒤쪽으로, 고개 돌려 보기에는 핑곗거리가 없다. 이렇게 해서 그녀를 찾을 수 있을까? 이게 잘하는 짓인가? 딸아이가 나를 봤는지 손을 흔든다. 나도 따라 손을 흔든다.
소독약 냄새를 뒤로하고 수영장 문을 나오고 있었다. 크지 않은 유리 창문 뒤로 그녀가 보였다. 삼십여 년이 흘렀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단숨에 그녀의 발걸음을 쫓는다. 오지랖이 넓은 사람인지 아는 사람이 많다.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핀다. 반쯤 풀어져 버린 파마머리, 약간 돌출한 눈, 자그마한 코, 보였다 말았다 하는 귓불 큰 귀, 주름 없는 입술. 그녀의 얼굴에서 사진 속 그녀의 얼굴을 찾는다. 현실과 상상을 하나씩 대조해 본다. 그녀가 틀림없다. 곱게 나이 든 얼굴. 여전히 아름답다. 막상 그녀를 찾게 되니 현실이 꿈같이 느껴졌다. 가슴이 방망이질을 해댄다. 그녀의 얼굴에 좀 더 집중해 본다. 사람 얼굴을 집중해서 쳐다본 사람은 안다. 상대방이 알아채지 못하게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다행히도 그녀는 바빠 보인다. 건물 안의 중국인을 모두 아는 듯, 인사할 사람이 많다. 편히 복도와 계단을 지나칠 수 없다. 나는 사람들에 섞여 옷깃이 스칠 정도로 가까이도 가 보고 계단 한 층을 사이에 두고 지켜보기도 한다. 사진 속 그녀를 진짜 찾게 될 줄이야, 전화기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아이의 수영이 끝날 시간, 주차 미터기에 동전을 더 넣어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용기를 내야 할 시간이다. 지갑을 돌려줘야 한다. 그녀가 혼자되기를 기다린다. 그녀가 메인 홀을 지나 밖으로 향한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따른다. 풀어진 파마머리와 좁은 어깨가 바로 눈앞이다. 익스큐즈 미! 헬로! 그녀가 뒤돌아본다. 루이뷔통을 뒷주머니에서 꺼내 그녀의 눈높이 쪽으로 내민다. 그녀의 두 눈이 커진다. What is this? 웃지 않으며 그녀가 묻는다. I was looking for you, isn't this yours? 내 목소리는 작아졌다. 이 여자가 아니었나? 나는 지갑을 열고 단양이라고 쓰인 멤버 카드를 꺼내 들고 당신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Oh, Dan Yang I know her!" 그녀가 웃으며 대답한다. 이 여자는 그녀가 아니었다. 이 여자가 나보고 따라 오란다. 단양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단다. 나는 말없이 이 여자를 따른다. 계단을 오르고 메인 홀을 지나 어느 룸으로 들어간다. 네 명의 여자 노인들이 마장을 하고 있다. 나를 안내해 온 여자가 어느 노인에게 다가가 중국말을 한다. 노인이 귀찮은 투로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와 같이 내 쪽으로 다가온다. 얼굴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고 작은 체구에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작은 키였지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나에게로 다가왔다. 노인의 얼굴에서 그녀의 얼굴을 찾아본다. 이 사람이 단양 일 수는 없다. 나이가 안 맞는다. 그녀의 늙은 얼굴을 상상할 수 없다. 여자가 나에게 이 분이 단양이라며 소개한다. 이 상황을 이해 못 한 나는 지갑을 꺼낸다. 노인에게 이 지갑이 당신 것이냐고 묻는다. 노인이 자기 것이 맞는다며 손을 내민다. 노인의 얼굴에 반가운 웃음이 번진다. 노인을 믿을 수 없어 내밀던 지갑을 빠르게 거둔다.
"지갑 안에 돈은 얼마나 있는 돼요?"
"기억 안 나는데.."노인은 머뭇거리며 뒷 말을 흐렸다.
지갑을 선선이 내줄 수는 없었다.
나는 급히 지갑을 열고 사진을 꺼내 보인다.
"이 사진 속 여자는 누군데요?"
"내 죽은 딸!" 노인의 짧은 대답이 귀에 메아리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