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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뭐하십니까

SNU행정담론 ep#003

by 정현

얼마 전 모 당에 젊은 대표가 선출되었다. 30대 청년 제1야당 대표의 등장도 신선하고, 파격적 행보에도 관심이 가지만, 뉴스를 통해 알려지는 국가 의전서열 8위라는 대목이 나의 눈길을 끈다. 국가 의전서열은 국가의 외교 행사나 공식 행사에서 지켜야 할, 대우와 관행에 따른 의전 순서를 말한다. 당연히 대통령을 1위로 해서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재소장, 국무총리에서 감사원장, 장관, 대법관, 검찰총장, 각군 참모총장, 국회의원까지 웬만한 분들을 대접하는 순위가 의전서열이다. 이 서열은 당사자는 물론, 그들의 비서진에서 더욱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각종 행사의 좌석배치에도 적용된다. 때론 행사장 의자에 붙인 명패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옮기며 조금이라도 앞에 세우려는 비서진과 주최 측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우리 대학에서는 매년 6월이면 전몰 동문 기념비 앞에서 작은 추모행사를 연다. 전몰 동문 기념비는 우리 대학에서 ‘재학 중 6.25 전쟁에 참전하여 고귀한 목숨을 희생하신 동문들을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제작한 조형물’이다. 기념비가 완성된 어느 해, 개막식을 겸한 추모행사에 국무총리께서 참석하신다는 연락이 왔다. 소소한 학교 행사가 갑자기 커져버렸다.


교내 한 건물 로비에 마련된 행사장 안에서는 일찍 도착한 총장님과 참가 학장들이 과거를 회상하며 소곤소곤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행사 준비팀은 바쁘게 이것저것을 챙겨가며 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밖에는 이른 장마가 시작되었는지 주룩주룩 비가 내려서, 행사장 분위기를 착 가라앉히며 추모 분위기가 더욱 깊어갈 무렵, 총리실 의전차량이 경찰차량 몇 대와 함께 도착했다. 사전 점검을 위해 차에서 내려 건물로 들어오는 검은색 양복의 수행원들 중, 익숙한 얼굴이 나를 보며 "오랜만입니다. 수고 많지요?" 하면서 악수를 청한다. 우리 대학에서 함께 전임 총장님을 모시고 수행했던 꼼꼼한 선배였고, 총리실로 옮겨서는 의전 비서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비서관은 총장님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행사장 전체를 둘러보며, 역시 성격대로 하나하나 꼼꼼하게 점검을 시작했다.


행사장 밖의 비는 점점 더 굵어졌다. 시작 2분 전, 총리 차량이 정문을 통과한다는 무전이 왔다. 갑자기 바빠지는 경호원들과 의전비서관이 현관 밖으로 빠르게 이동했고, 총리를 기다리시던 총장님과 학장들 그리고 참석자들이 강한 비를 피해서 현관 밖 처마 밑에 마치 병풍처럼 펼쳐져 서있었다.


멀리 보이던 총리 차량이 행사장 100여 미터 앞에 다가오는 순간,

행사장 앞 도로가에 서있던 의전 비서관이 뒤돌아서 처마 밑을 향해 외쳤다.


지금 거기서 뭐하십니까!


빗속을 가르며 울려오는 낮은 톤의 목소리 한마디에

처마 밑 사람들이

다가오는 차량을 향해, 빗속을 헤치며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분들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쳐다보았다.


아! 이게 의전인가?




의전이 과하면 독이 되고 부족하면 결례가 된다. 의전은 눈높이가 중요한데, 눈높이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맞추어 과하게 되면 부담이 되고, 부족하게 되면 뒷일을 걱정하게 된다. 그래서 대접받는 사람에게 맞추게 되면 과한 의전은 아무리 과해도 모르는 척 넘어가지만, 조금이라도 모자란다 싶으면 섭섭함을 마음속에 담아 간다.

'나를 이렇게? 이런 괘씸한.. 두고 보자...'


의전의 눈높이를 적당한 선에서 맞추면 참 좋은데, 그 기준이 도무지 아리송하다.

외교부에서는 의전을, '타인에 대한 상식과 배려를 바탕으로, 국가 간의 관계 또는 국가가 관여되는 공식행사에서 개인 및 국가가 지켜야 할 일련의 규범(a set of Rules)을 뜻합니다... 의전의 원칙은 타인에 대한 상식과 배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비단 국가 정상 간의 행사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비즈니스 매너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상호 존중과 배려, 좋은 매너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유지와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https://www.mofa.go.kr/www/wpge/m_3822/contents.do)


결국, 의전 눈높이 상호존중과 배려, 좋은 매너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얘기인데, 우리는 굳이 서열을 만들어 존중과 배려의 순서를 먼저 따지고 있다.


눈높이의 기준인 상호 존중과 배려는 서열이 없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만약 서열이 꼭 필요하다면, 우리가 잊고 지내는 사실 하나를 먼저 기억해야 한다. 서열 1위인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국회의원까지, 서열에 드는 웬만한 사람들 모두가, '경하는 국민을 위해서... 국민의 뜻이라면...'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는 점이다. 그들의 말처럼, 우리가 그들의 주인이고, 그 말이 진심이라면, 우리의 의전 서열은 바뀌어야 한다. 당연히 국가 의전 서열 1위는 대통령이 아닌 국민이 되어야 한다.


이 눈높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주룩주룩 내리는 장대비나 주인들을 무시하면서

잠시 들리는 웬만한 손님의 서열만을 생각하게 되고

오히려 우리에게

‘지금 거기서 뭐 하십니까?’ 하는 소리를 지르게 된다.


우리가 깨우쳐주자.

대한민국 의전서열 1위는 우리다.

소리만 쳐대는

당신들은 지금

거기서 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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