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cker Park, Chicago
원래 제목은 시카고의 한 동네 이름인 '위커 파크 Wicker Park'인데 어쩌다가 국내 개봉 제목은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위커 파크라고 해서 뉴욕 센트럴 파크처럼 진짜 공원인 줄 알았는데, 구글맵을 찾아보니 동네 이름이더군요. 시카고 힙스터 문화의 중심지이면서 시대별로 트렌디한 가게들이 줄을 서있는 곳이라고 하니, 굳이 우리로 치자면 홍대 정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홍대도 요즘은 그렇지도 않지만요. 아내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꽤 마니아층이 깊은 영화인데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를 줄여서 '당사동'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뭔가 홍대 옆에 있는 '당산동' 같은 느낌이 드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난 느낌은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라는 제목보다는 '당사동'이 더 어울리는 것 같은 기분은 뭘까요.
시카고는 가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동부에 가까운 분위기의 중부내륙 도시는 이런 느낌일까, 생각하면서 영화에 집중했습니다. 영화 자체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건물들, 간판들, 사람들 옷차림을 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이지 않을까요. 시카고 위커 파크 동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엇갈리는 사랑이야기를 그린 영화여서 영화 제목도 위커 파크라는 지명을 그대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지역과 시대를 대표하는 힙한 공간이기 때문에 미국 현지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그대로 위커 파크라고 개봉했다면, 무슨 영화인지 도통 예상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 띄기가 어려웠을 것도 같고요.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라는 로맨틱한 제목과는 사뭇 다르게 영화 소개를 살펴보면, 무려 장르가 '미스터리 스릴러'입니다. 사랑과 스릴러라뇨. 문득 미저리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영화 내용 스포일러 없이 몇 가지면 짚어보자면, 계속 엇갈리는 옛 연인들의 작은 이야기들이 모두 미스터리 한 것들이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됩니다. 여주인공의 미스터리 한 행동도 행동이지만, 영화가 제작된 지 근 20년이 지난 지금의 기준에서 보면 미스터리 한 점들이 더 많습니다.
영화 속에서 정상으로 비치지만 갑자기 옛 연인의 흔적을 좇는 조쉬 하트넷의 행동들은 지금으로 치면 사실 모두 엄청난 성범죄이거든요. 남의 열쇠를 가지고 몰래 호텔이나 집에 잠입한다던가, 우연히 만난 여자의 유혹에 넘어간다던가, 해외출장을 갔다고 거짓말하고 잠적해 버린다던가, 지금으로 치면 뉴스속보로 나올 법한 이야기들입니다. 10~20년 사이에 우리의 기준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였네요.
지금의 어린 친구들이 보면 고구마 여러 개를 한 번에 먹은 것 같이 답답한 부분도 있습니다. 휴대폰도 다 있었을 시기인데, 서로 계속 연락이 엇갈리고, 꼭 집에 있는 자동응답기에 의존하고 말이죠. 당시에는 없었던 서비스이지만 페이스북만 하고 있더라도 이런 영화는 나올 수 없었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영화들이 주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2004년의 영화가 벌써 '옛 영화'로 표현된다는 게 조금 서글프기도 하네요. 당시 한창 한국의 위커 파크 정도 되는 홍대를 누비고 다닐 시기였으니 말이죠. 요새는 코로나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 힙하다는 동네에 가본 적이 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옛 영화들은 화려한 효과가 없기 때문에 내용 자체를 아주 치밀하게 구성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죠. 화면으로 몰입시키는데 제한이 있으니 구성으로 그 간극을 메꾸는 것이죠. 과거와 현재, 그리고 영화 시작에 나왔던 시기까지 서너 가지 시간대가 땋아놓은 머리처럼 한 갈래로 모이는 것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샌가 두 시간이 흘러 반전을 거듭하는 결말에 다다릅니다. 잔잔한 영화는 아니지만, 겨울철 눈 오는 시카고 거리를 따라서 숨 막히게 엇갈리는 옛 연인들의 미스터리 한 사랑이야기를 보고 싶다면 한번 찾아볼 만한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