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추억을 떠올리긴 했는데
주말 저녁에 무슨 영화를 한 편 볼까 뒤적거리다가 요즘 '트립 투 그리스(The Trip to Greece)'라는 제목이 많이 눈에 띄길래 이 영화에 대해 좀 알아보았습니다. 연출된 상황을 다큐멘터리인 것처럼 촬영한 모큐멘터리(Mockumentary)라고 하길래 뭔가 날 것의 여행을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기더군요. 조금 더 정보를 찾아보니 영국, 이태리, 스페인으로 이어지는 총 네 편이 시리즈로 제작되었길래 시작하는 김에 첫 작품인 영국 편부터 보기로
우리나라에는 '트립 투 잉글랜드'라고 알려져 있는데 원 제목은 영국 사람들의 영국 여행이다 보니 그냥 '여행(The Trip)'이더군요. 2010년대에 개봉한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영국에서 연수를 받던 시절이 2011년이니 왠지 그때 거닐던 거리들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번역 제목도 영국, Britain, U.K 같은 넓은 영국이 아닌 잉글랜드라고 딱 되어 있었기에, 적어도 런던은 나오겠지, 혹시 Bedford나, Campton, 아니면 Shefford도 나올지도 몰라, Hitchin, Luton은 교통이 편리한 곳이니까 지나치지는 않을까, Cambridge나 Brighton은 유명하니까 아무래도 나오겠지... 등등 다양한 기대를 하며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쉽게도 기대는 모두 무너졌습니다. 대단한 여행을 다룬 흥미진진한 영화라기보다는, 그냥 편하게 틀어놓고 보다 말다 하기 좋은 그런 영화였습니다. 혹시 제가 영국인이라면 좀 느끼는 게 다를 수도 있겠죠. 시종일관 영국식(서양식) 유머와, 잘 모르는 사람의 성대모사로 오디오는 꽉 차있고, 여행이 주제이긴 한데 도대체 어디인지도 모를 지역에서 우중충한 날씨만 계속 이어집니다. 진짜 날 것의 영국 같기는 하네요. 휴대폰도 안 터지는 어디 산속을 내비게이션도 없이 지도 보고 찾아가서 거기 있는 유명인사가 묵었던 사적지를 둘러보고, 식당에 가서 맛있는 식사를 하고, 또 성대모사, 유머... 계속 이렇게 이어집니다. 우리로 치면 가평 거쳐 춘천 지나 강릉 가서 오죽헌 둘러보고 오는 그런 여행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로컬 English들에게는 이게 The Trip이겠죠. 우리만 해도 외국인의 여행은 서울이겠지만, 우리의 여행은 강원도이니까요. (비행기 타는 거창한 여행을 빼면 말이죠.)
문득 옛 생각이 나더군요. 10년 전 영국은 그랬었습니다. 전화기가 안 터지는 곳이 많았죠. 지하철이야 지하니까 그렇다고 이해는 했는데, 통행량이 많지 않은 도로나, 차가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 많은 구간에서 전화기가 거의 안되었었습니다. 내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 미리 다운로드하여 둔 구글맵으로 체크했던 기억이 나네요. 이때만 해도 스마폰 보다 피처폰이 많았었고, 내비게이션이 모든 길을 다 알려주는 건 아니었고... 그랬었죠.
몇 가지 재미요소가 있기는 했습니다. 삶을 시종일관 가볍게 여기는 것 같지만 진지하게 그날의 행복을 찾아가는 롭과, 매사에 진지한 듯 하지만 매번 다른 여자를 기웃거리는 스티브의 삶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면서 현대인이 가진 모순적인 삶에 대해서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으라고 하면 매일의 여행 중 한 번씩 나오는 식당의 요리 장면입니다. 제목은 여행인데 너무 여행과 관련된 장면이 없다 보니, 차라리 대사 없이 묵묵히 요리만 하는 몇 초의 화면이 더 여행 같아 보였거든요. 아무래도 이 영국인들이 외국여행을 떠난 이태리, 스페인, 그리스 편이 더 낫기는 할 텐데, 다시 선뜻 보게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코로나19 시국에 방구석에서 유럽 랜선 여행이라도 떠나볼까 했는데, 이 영화는 그쪽에는 좀 맞지 않는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