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역사, 그리고 엠마 스톤
엠마 스톤이 나오는 영화는 때 맞춰 보지 못하더라도 챙겨보는 편입니다. 극에서 맡은 역할에 맞춰 매번 머리 색깔이 달라지는 그녀의 연기는 같은 배우이지만 같은 배우 같지 않은 매력이 있습니다. 이번 주말에 보기로 한 영화는 아내가 골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개봉했던 영화였는데, 엠마 스톤 주연의 영화였는데도 불구하고 극장에서 챙겨보지 못했었네요. 기억을 되새겨보니, 무척 보고 싶었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배급이 제대로 되지 않은 탓에 당시 지방에 살고 있던 저로서는 미처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라도 집에서 잊지 않고 볼 수 있게 상기시켜준 아내에게 감사해야겠네요.
The Favourite. favorite이 아니고 u가 하나 더 들어간 favourite이었습니다. 영국 역사를 다룬 영화답게 포스터, 제목부터 풍기는 분위기가 좋습니다. 서양사에 대해서는 사실 잘 모르기 때문에 얼마나 고증이 되었는지, 어디까지 픽션인지 잘 모르지만, 유명 배우가 출연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베니스 영화제 수상작이라고 하니 작품성 면에서도 인정받은 작품인 것 같습니다.
역사에 대한 전문지식이 풍부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시대극을 보고 있으면 내용 자체뿐만 아니라 당시의 생활상을 볼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몰락한 귀족에서 왕궁의 시녀로 들어가서 차근차근 신분을 상승하는 엠마 스톤을 보면서 계층별로 달라지는 삶의 모습이 참 흥미로웠습니다. 하인들이 쓰는 공간은 작은 창문에, 낮은 천장에 단조롭게 회칠한 벽이 인테리어의 전부였지만, 신분이 높아질수록 넓어지는 방의 크기, 높아지는 천장의 높이, 그리고 빈틈없이 채워진 각종 그림과 액자들. 18세기 영국 왕실이 실제로 저랬을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 봅니다.
개인적으로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도 참 좋아합니다. 같은 영어 대사가 나오는 영화이지만 미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와는 다른 결이 있죠.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만 쓰는 몇 가지 어휘를 찾아가는 재미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이런 면에서 다 좋았습니다. 주연배우도 favourite이었고, 시대적, 공간적 배경도 다 favourite이었습니다.
내용도 흥미진진했습니다. 이 영화는 여왕의 주변에서 맴돌다가 여왕의 선택을 받고, 이러한 위치를 이용해 오히려 여왕을 이용하여 권력 남용하는 무서운 여인들의 암투를 다룬 영화입니다. 우리 역사에도 이렇게 권력자의 곁에서 사욕을 채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드라마가 어디에나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은 사실 그렇게 선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여차하면 지루하게 빠질 수 도 있는 이야기지만, 여왕과 그녀를 둘러싼 두 여자의 삼각관계를 통해서 교묘한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한 편의 치정극인 것 같지만 그 뒷면에는 사실 권력의 암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직설적으로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타입과, 원하는 것을 알아서 해주도록 여린 모습으로 상황을 조성하는 타입, 원하는 것은 같지만 정 반대의 두 여성이 다투는 모습은 칼을 들고 싸우지는 않지만 상당한 긴장감을 보여줍니다. 한쪽은 지금 가지고 있는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다른 한쪽은 밑바닥에서 탈출하고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처절히 노력합니다. 손안에 있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이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이의 싸움이니 이보다 더 치열한 싸움이 있을까요.
이 영화는 인간의 한계와 탐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토록 애타게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지만, 그때까지 조심조심 이를 위해 노력했던 과거의 마음은 쉽게 잊혀버리죠. 그리고 선을 넘고, 실수를 저지르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라는 과거에 들었던 랩 가사가 떠오르면서 영화는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