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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승주 May 09. 2021

할아버지의 소중한 외래 나들이 시간

나들이


대학병원 외래 진료는 그야말로 전쟁이다. 두세 시간 안에 50~60명 정도의 환자를 진료해야 하다 보니 교수님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진다. 환자에게 안내하랴 교수님의 오더를 체크하랴 분주한 간호사 선생님들도 정신이 없다. 3분 내에 진료를 마쳐야 하는 상황이니 교수님은 진료실을 떠나는 환자의 등에 대고 무어라 외치기도 하고, 환자들은 진료실 문을 나설 때까지 질문을 하기도 한다. 어려운 내용을 최대한 간략하게 전달하느라 애를 쓰는 교수님과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문을 나서는 환자들을 볼 때면 이 같은 진료 환경이 너무 한 것도 같지만, 우리나라의 비현실적인 의료체계 내에서는 이게 최선이다.


본과 3학년 시절, 정형외과 외래 진료를 참관하던 날이었다. 정형외과 외래, 특히 척추나 고관절을 다루는 외래에는 노인 환자분들이 많다. 우리 몸도 다른 도구들과 다를 바가 없어서 많이 사용하다보면 뼈가 점차 닳고, 좁아지고, 붙어버리고 하기 때문에 허리 디스크, 협착 등의 문제로 노년기에 병원을 찾는 것이다. 가뜩이나 바쁘게 돌아가는 외래 진료인데 관절이 아픈 환자분들은 진료실에 느릿느릿하게 걸어서 들어올 수밖에 없고, 그렇다 보니 진료는 더 여유없이 진행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이유로 교수님들 중에서, 특히 정형외과 교수님들 중에서는 양방 진료를 하시는 분들이 많다. 양방 진료란 두 개의 진료실을 사용하는 것인데, 각각의 진료실에 환자가 들어가고 한 환자의 진료가 끝나면 교수님이 바로 옆방으로 이동하여 진료를 하는 것을 말한다. 교수님이 옆방에서 진료를 보는 동안, 진료를 마친 환자는 천천히 진료실을 나가게 되고, 다시 다음 환자가 그 방으로 들어와 교수님의 진료를 기다린다.


그날도 늘 그렇듯 정신 없이 양방 진료가 진행되고 있었다. 방을 오가며 한창 바쁘게 진료가 진행되고 있던 중 한 할아버지가 진료실로 들어왔는데 다른 환자들과는 달리 멀끔한 모습이었다. 정형외과 환자들은 주로 관절이 아프기 때문에 어딘가 절뚝거리며, 혹은 어딘가 불편한 듯한 자세로 진료실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따뜻한 분위기의 갈색 정장에, 반듯한 넥타이, 그리고 깔끔한 구두를 신고 편한 자세로 걸으며 진료실로 들어왔다.

   ‘대체 어디가 아픈 걸까...?’

나는 환자의 병소를 발견하고자 요리조리 눈을 굴렸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교수님?”

할아버지는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네. 할아버지. 또 오셨네요. 보자... 어이구! 오늘도 아무런 문제가 없네요. 건강하십니다.”

   “하하하. 그런가요? 요즘 컨디션도 좋더라고요.”

   “늘 그렇게 지내시면 되겠습니다. 걱정하실 거 없어요.”

이전까지 긴박하게 흘러가던 진료실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대화들이었다.

   “얼마 전에 아들 내외가 와서 아내 제사도 지냈고요. 참, 오는 길에 보니 벚꽃도 피었더라고요. 이제 또 봄이 오려나 봅니다.”

   “그래요, 할아버지. 봄에도 건강하게 지내시고요. 오지 말라고 해도 다음에 또 오실 거죠? 그러면 보자... 6개월 뒤 쯤에 뵐까요?”

   “6개월이요? 그러면 또 한창 더울 때 뵙겠네요. 알겠습니다. 교수님도 늘 건강하시고요.”

   “네. 할아버지도 건강히 지내시고 또 6개월 뒤에 뵙겠습니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진료실을 나갔다.


할아버지의 진단명은 계절예측병인걸까. 정상적인 진료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대화들을 듣고 어리둥절하게 있던 나에게 교수님이 말을 걸었다.

   “예전에 진단 받으셔서 치료도 다 됐고, 추적 관찰기간도 다 지나서 이제 정말 병원에 안 오셔도 되는데 매번 저렇게 오시네.”

그 말을 듣고 있던 간호사 선생님이 한마디 덧붙였다.

   “이제 안 와도 된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려도 기어코 꼭 저렇게 6개월마다 꼬박꼬박 찾아오셔요. 아내분과도 사별하시고 혼자 지내시면서 그냥 일년에 두어번씩 여기 나들이 오시는 거죠. 오시는 길에 꽃도 보시고 산책도 하시고요. 어쩌겠어요.”


나는 별 의미없는 진료인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진료실에 찾아오는 할아버지를 반갑게 맞아주고는 바쁜 시간 탓에 어쩔 수 없이 금방 돌려보내는 교수님과 간호사 선생님이 무언가 귀엽게 느껴졌다. 2018년에 발표된 한국 보건사회 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노인이 자살을 생각하는 이유 중 30% 정도가 ‘외로움’과 ‘부부 및 자녀 등과의 갈등, 단절’이다. 다른 선진국들에 비하여 우리나라는 유독 노인들의 문화가 없다. 급격한 사회 성장 속에서 본인들이 영위해왔던 삶의 양식은 철저하게 뒷전으로 밀려났고, 새로운 관계와 일들을 시작해 보자니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다.* 일부 아파트 노인정이나 복지관에서 노년층의 사회적 교류를 장려하고 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일부 사람에게만 접근 가능한 방식이다. 친구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가족들은 명절에나 가끔 보는 상황에서 하릴 없이 마지막 순간만을 기다리는 건 그들에게 너무 서글픈 일이 아닐까?


다행히 외래 진료에 나들이 온 할아버지의 표정은 밝아보였다. 불필요한 진료는 의료 자원의 낭비라 배웠으나, 일년에 두 번, 반듯한 옷을 입고 집을 나서는 할아버지의 소중한 외래 나들이 시간은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좋겠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세요, 할아버지.


* 안타깝지만 노인들이 자살을 생각한 이유 중 가장 비중이 높은 것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전체의 27.7%를 차지한다. 노인 빈곤은 심각한 사회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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