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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승주 May 09. 2021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는 그 상실과 병듦에 대하여

상류


얼마 전 아는 지인으로부터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암으로 진단 받았다는 것이었다. 병명은 말트림프종(MALToma)이었다. 비록 다른 암들에 비해 예후가 좋은 편에 속하긴 했지만, 그래도 88년생의 젊은 남성에게 암이라고 하는 단어는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다. 위로의 말을 전한 후 한창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지인이 이야기했다.

    “진단을 받고 나니 문득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아. 진단 받고 다음날부터 컨디션도 너무 안 좋고...”


그의 질병은 하루만에 악화된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암은 그렇게까지 급성으로 진행하는 질병이 아니다. 더군다나 암으로 진단받긴 했지만 다른 부위로 전이가 된 것도 아니었다. 변한 건 본인이 암환자가 되었다는 ‘인식’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전신 상태는 하루 사이에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몸은 무겁고, 괜히 더 피로감이 들고, 마음이 답답하기도 하였다. 암환자라는 인식이 생긴 후에야 비로소 그는 정말로 암환자가 되고만 것이다.


객관적인 대상으로 실재하는 암세포를 부정하고자 이러한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다. 당연히 암세포는 우리의 인식과 무관하게 점차 자라나 결국에는 우리의 몸을 갉아먹으며 그 존재감을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의학이 질병 그 자체가 아니라 질병으로 인해 사람에게 나타난 현상을 다루는 학문이란 사실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환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같은 사람에게서도 암이란 사실을 알고 난 전과 후의 신체적 반응이 그토록 다르다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같은 종류의 암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병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다. 누군가는 작은 통증에도 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제법 강한 통증도 거뜬히 참고 견딘다. 누군가에게는 번듯한 삶 속에 찾아온 통증이 큰 불청객일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더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그까짓 통증 쯤이야 부차적인 산물일 수도 있다. 병에 대한 인식과 지식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고, 살아온 사회문화적 환경이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자명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인생사가 분명 인간이 자신의 몸을 체험하고 가지는 방식을 형성한다.’1


이처럼 질병이 각 개인에게 드러나는 의식 현상이 다르고 그로 인해 나타나는 반응이 다르면, 이에 대한 의학의 접근도 달라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지속적인 관리가 중요한 만성질환이나 임종기 문제 혹은 원인을 명확하게 특정하기 어려운 정신질환과 관련하여서는 그러한 접근법이 더욱 중요시된다. 하지만 병태생리학적 특성이 선험적으로 규정된 질병이 존재하고, 각 환자는 해당 질병이 발발하는 하나의 개별 사례인 것처럼 접근하는 현대 의학의 생의학적 모형으로는 개인에게 드러난 각기 다른 현상을 인식하는 일조차 쉽지가 않다. 애초에 선험적으로 규정된 질환 목록 속에서 개개인의 역사와 사회문화적 맥락을 질병의 원인과 예후 인자로 고려한다는 것은 그 정의상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특정 질병군 혹은 특정 시기의 의학적 문제들을 현상학적으로 정의하고 접근하는 것은 개개인의 상황을 더 다양하게 고려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이를 위해서는 관점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명백히 현상학적으로 모든 환자들은 저마다 다른 질병을 앓고 있다. 이 다른 질병을 인식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결국 의사들이 질병을 환자의 시선으로, 혹은 각 지역사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방법밖에 없다.


이는 고된 과정일 수밖에 없다. 각 환자들의 눈으로 현상을 바라보는 것은 인간에 대한 높은 수준의 감수성을 요구하는 일이다. 환자가 중요시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질병을 바라보는 입장은 어떠한지, 가족과 지인들의 지지는 충분한지, 근심이나 불안이 질병에 더욱 불을 붙이고 있는 건 아닌지, 실제 운동을 실천할 만한 환경인지, 경제적인 문제가 다른 모든 의학적 요소들을 뒷전으로 내버려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삶을 변화시킬 의지가 없다기 보다는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상황에서 학습된 무력감이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일들은 정치인, 행정가, 사회복지사뿐만 아니라 당연히 의사도 고려해야 하는 것들이다. 어쩌면 의사가 가장 제일  파악할 수도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가 어떻게 발생하였던, 얼마나 곪아 터졌던, 결국 개인의 역사라고 하는  강에서 문제를 안고 아랫목으로 떠내려와 환자가 만나게 되는  의사이기 때문이다.


강의 하류에서 거룩하다고 믿어왔던 의학의 틀에만 갇혀서 “담배를 끊으셔야 합니다”, “운동하세요”, “우울하게만 있지 말고 밖에 나가서 친구들도 좀 만나고 하세요”와 같은 처방만 내리고 있다면 문제의 해결은 요원하다. 문제의 시작이 되는 상류로 올라가 환자의 시선으로 살펴보자. 진단명에서 벗어나 환자의 눈으로 바라보자. 그리고 고민하자. 인생의 역정과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는 그 상실과 병듦에 대하여.




1) 헤르베르트 플뤼게, 『아픔에 대하여』, 돌베개(2017),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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