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편지, 소년의 일기

by 은선


소녀의 편지


안녕.

내가 누군지 알겠지?
맞아, 2학년 때 전학 왔던 아이.
첫날부터 엉망인 채로 너를 만났었지.
나는 쫄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아이들 모두를 한 명 한 명 노려봤어. 아무도 나를 건드릴 수 없게 말이야.

아이들은 다들 눈을 피하거나, 비웃었어.
제일 뒷자리, 창가 쪽에 앉아 있던 너도 봤지.
넌 내 눈을 보고 바로 피했더라.
바람에 흔들리던 커튼 뒤로 숨어버린 네 눈빛.
그래서 더 이상 널 알 수 없을 줄 알았어.

그런데 넌 일부러 날 약 올리고 괴롭혔어.
거지라고 놀리고, 내 옷을 잡아끌었지.
"바보냐?"라고 물었을 땐, 맞아. 나는 바보였어.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그리고 제일 모르겠는 건 너였어.

내가 지나가면 발을 걸어 넘어뜨리다가도,
넘어지기 직전에 내 팔목을 잡아줬지.
그때 네 손에 땀이 배어 있었어. 왜였을까?

운동장에서 혼자 외톨이로 앉아 있을 때,
축구하던 너는 공이 아니라 자꾸 나를 쳐다봤지.

개구리를 잡아다가 내 앞에 던져 놓고는,
내 얼굴이 붉어지자 너도 볼이 붉어졌었지.

이상하게 너를 자주 마주쳤어.
미술실에서 찰흙을 훔칠 때도, 네가 내 앞에 있었어.
"도둑년"이라고 하지 않고,
“안 가져가면 안 되냐”라고 물어줬지.

미안하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해야
아이인 채로 남아 있을 수 있었어.
어쨌든 선생님께 이르지 않아 줘서 고마웠어.

그리고, 진짜 거지꼴로
한밤중에 술 심부름 다녀오던 나를 봤을 때,
왜 그땐 "거지"라고 하지 않았어?

교실 바닥에서 별사탕을 주워 먹고 있을 때도,
왜 그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너의 그 부드럽고 윤기 나던 앞머리가
눈을 찔렀던 걸까?
너의 눈, 정말 빛났었어.

내 앞에서 말수가 줄어들고
입술만 잘근잘근 씹다가
입술이 사라지기 전에 손톱도 잘근잘근 씹던 너.

내가 전학 가던 날,
또 거지꼴로 애들 앞에 서서 인사하던 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교실 속에서
넌 커튼 뒤에서 날 뚫어지게 바라봤지.

네 눈이 너무 반짝거려서
나는 네가 울고 있는 줄 알았어.
그럴 리 없었겠지만, 말이야.

이제 나는 벌써 4학년이 됐어.
가끔 네가 생각나.
보고 싶다는 말이야.

혹시 네가 내 친구였다는 착각,
그거, 욕심일까?

다시는 너를 만날 수 없겠지만
이 편지가 너에게 닿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냥 말하고 싶었어.
나를 유일하게 바라봐 줘서 고마웠다고.






소년의 일기

그 애가 전학 가던 날이 생각난다.
벌써 십 년이 지난 일이다.

얼마 있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가버렸다.

그 애가 전학 왔던 날이 잊히지 않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까만 눈이
아이들을 한 명씩, 한 명씩 집어보고 있었다.

작고 오똑한 코 아래, 딸기색 입술이 오물거리며 뭐라 했는데
그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 입술만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내가 너무 쳐다본 걸 들켰을까?
그 애의 눈과 마주쳤을 때,
흔들리던 커튼이 내 마음을 가려주었다.
그 커튼은 언제까지 내 마음을 가려줄 수 있을까.

마음은 어느새 온통 그 애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 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거지’라고 놀리고,
‘바보’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 애의 조개껍데기 같은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부러질 듯한 팔을 잡아본 날이 있었다.
나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발이 나도 모르게 그 애 앞으로 뻗어졌다.
젓가락 같은 다리가 힘없이 꺾이더니,
그 애는 툭 하고 넘어졌다.

내 팔도, 나도 모르게
그 애의 하얗고 가느다란 팔을 붙잡았다.
내 손으로도 감싸질 만큼 가녀린 팔에는
솜털이 바짝 서 있었다.

그 순간,
그 애의 앞머리에 가려졌던 눈을
처음으로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갈색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마치 내가 던진 돌멩이가
그 애의 호수에 물결을 일으킨 것만 같았다.

그 눈을 계속 보고 싶었다.
햇볕 아래 혼자 앉아 있던
그 애의 머리카락도 갈색이었다.

그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길 때
살짝 드러나던 작은 귀는
말도 안 되게 귀여웠다.

어느 날,
미술실에서 초점 없는 눈으로 찰흙을 보던 그 애는
그대로 찰흙을 옷 속으로 숨겼다.

그 자리에 내가 서 있었다는 게
그 순간만큼은 원망스러웠다.

나는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혹시 그 말이 그 애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그 애에게 주려고 샀던 사탕은
집에 그대로 쌓여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애가
바닥에 떨어진 별사탕을 주워 먹고 있었다.

난 왜,
그 별사탕 하나를 건넬 용기조차 내지 못했을까.

그 밤,
우연히 골목에서 그 애를 마주쳤던 것처럼
다시 볼 수 있을까.

그 애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날,
내 눈물을 들켰을까?

그때, 눈물이 차올라 앞이 보이지 않아
그 애의 마지막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게
가장 아쉽다.

아직도 내 마음이
그리움으로만 남아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저,
다시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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