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로 됐다.

가을의 신작로

by 은선


하늘은 너무 파랗고 깊어서 발을 담그고 싶을 정도다. 차가운 바람, 따뜻한 볕이 온몸을 감싸준다.

가을이 되면 집으로 가는 신작로 옆으로 코스모스가 핀다. 코스모스 물결 속으로 자전거를 타고 입장한다. 꽃잎 곁을 스치며 페달을 밟다 보면 이파리들이 엄마의 장난처럼 다리를 간지럽힌다.

그 가여운 것들을 참을 수 없어 목을 꺾어본다. 가을볕에 바랜 분홍빛을 만져본다. 누구의 살결 같다. 품에 안기고 싶은 보드라운 꽃잎을 얼굴에 충분히 부벼보고, 결국 바닥에 떨어뜨린다.

자전거 바퀴에 짓이겨졌지만, 넌 충분히 잘 살았다. 누군가의 환상을 충족시켜 주었으니, 그걸로 됐다.

바닥엔 추수가 끝난 벼이삭들이 말라 있다. 황금빛 알알이 들을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뒤집어야 한다.

할아버지의 손을 거쳐 잘 말려진 곡식들이 가마니에 담겨 리어카에 실린다. 저 멀리 보이는 리어카를 끌고 가는 사람이 우리 할아버지가 아니길—

자전거는 코스모스 속에 잠시 눕혀두고 리어카의 엉덩이를 민다.

가을의 얼굴은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검은 아스팔트와 할아버지의 추레한 뒷모습만 보며 나는 앞으로,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

고개를 들면 꼭대기에 우리 집이 있다. 곡식과 리어카를 내팽개치고 할아버지와 나란히 마루에 걸터앉는다. 지하수 한 사발, 할아버지는 담배 한 개비, 나는 초코파이 하나.

서로의 입이 달았으니—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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