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화산이 내 속에서 꿈틀대는 것 같았다. 쓰디쓴 배신감과 분노, 황당함으로 나는 생각이 마비되고 손발이 떨렸다. 그 욕쟁이는 누구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내 얘기를 들은 남편은 당장 그 집으로 쫓아가자며 흥분을 했지만 난 그동안 그 여자 집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었기에 정확한 집주소도 모르고 있었다. 지금 와서 보니 난 그 여자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남편도 잠시 스쳐가며 한번 본 얼굴뿐이고 어떤 증권회사인지 정말 증권회사를 다니는 건 맞는 건지도 몰랐고 집주소도,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알지 못했다.
다음날부터 그 욕쟁이는 아이 역시 놀이학교에 보내지 않았고 내 전화와 골수녀, J의 전화까지 차단해 버렸다. 나보다 더 큰 금액을 빌려준 J는 그런 미친 여자는 상대하면 안 된다고 그냥 똥 밟은 셈 치자고 했지만 난 쉽게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았다. 돈보다 그녀에게 마음을 쏟고 믿었던 내 마음에 대한 배신감이 너무 컸다. 그리고 살면서 그런 적나라한 욕을 들은 적도 처음이라 샤워를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맥주를 까마실 때도 잠이 들 때도 그 욕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고 날 괴롭혔다.
‘아.. 시바.... 아아악.. 시바.... 악악악... 시바아아아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했다. 난 똥을 밟았으면 그 똥을 상대에게 처발라주고 싶지 그냥 내 손으로 닦고 싶진 않았다. 그 미친 여자는 이런 짓이 일상일 것이다. 이곳으로 갑자기 이사 온 것도 분명 비슷한 행동을 저질러서일 것이고 그때도 그냥 넘어가주고 쉬쉬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또다시 이런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그 여자의 약점을 찾아야 했다. 그 여자의 정체를 공개하고 싶었다. 공개.. 공개적인 망신. 그것은 바로 SNS!! 난 내 SNS를 이용하기로 했다. 본인이 보지 않아도 된다. 그 여자를 아는 모든 사람들만 본다면 그걸로 충분히 여파가 있을 것이다. J에게 동의를 얻어 난 내 인스타와 블로그에 그 여자를 향한 공고를 올리기로 했다. 짧고 간결하고 개망신인 공고를.
다행히도 그 여자와 함께 찍은 사진들이 몇 컷 있었다. 그중 가장 이쁘게 나온 사진을 선택했다.
『지명수배.
이쁘니를 찾습니다.
원비가 없다며 눈물을 흘리며 제게 150만원을 빌려간 우리 이쁘니를 찾습니다.
분명 제가 원비를 빌려줬는데도 또 내야 할 원비가 있는지 J에게까지도 원비가 없다며 150만원을 추가로 빌려간 미스터리 한 그녀 이쁘니를 찾습니다. 그녀는 없는 게 왜 이리 많던지 이젠 카드값도 없다며 J에게 300만원을 추가로 들고 튀어버린 우리 이쁘니를 찾습니다. 없던 게 많던 그녀는 이젠 본인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문제는 저희 돈과 함께 없어져 버렸습니다. 우리 이쁘니를 보신다면 제게 꼭 연락 부탁드립니다. 참고로 우리 이쁘니는 화가 나면 쌍욕을 하는 버릇이 있으니 말걸 때는 조심해 주세요. 왈왈 물릴 수 있습니다.
#우리이쁘니어디숨었니 #집에숨었나 #부끄러우면돈만보내렴 #하나은행000-00-000』
골수녀는 내 지명수배글을 부리나케 퍼다 날랐고 놀이학교에도 내 글은 퍼져나갔다. 진짜냐며 엄마들에게 전화가 오기 시작했고 난 간결하게 미친년이라고 얘기해 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난 잠시 고민했지만 받아보았다.
“안녕하세요. 욕쟁이 남편입니다. 전에 잠시 뵈었었죠.”
“아 네 안녕하세요.”
“네 다른 게 아니라.. 제 와이프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는 와이프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긴말 더 하지 않고 우선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행히 이 남자는 제정신이었다. 난 본론이 궁금했다.
“네 얘기 들으셨다니 더 말씀을 드릴건 없네요. 무슨 일로 전화주신 건가요”
“사과도 드리고 빌려준 돈도 갚아드려야 할 것 같아 전화드렸습니다. J분께도 따로 연락드릴 예정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 네. 다행이네요. 금액은 알고 계시죠?”
“네. 저.. 그런데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돈은 바로 입금해 드릴 테니 죄송하지만 SNS에 올리신 글은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 제 와이프도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혹여나 그 미친 여자가 명예훼손 같은 걸로 고소하지나 않을는지 내심 걱정이 되던 찰나였기에 난 빌려준 돈만 돌려주신다면 바로 글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남편은 무언가 지친 말투로 금액에 대해서도 두 번 묻지 않고 바로 돈을 보내 주었고 난 J에게도 입금이 된 지 확인 후 바로 글을 내렸다. 찝찝함은 남았지만 그래도 후련했다. 만약 그냥 똥 밟았구나 하고 넘어갔다면 난 두고두고 그 여자의 쌍욕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똑같이 욕을 하며 그 여자의 머리채를 잡았을 수도 있지만 난 내 방식대로 그 여자에게 모멸감을 안겨줬다. 그것만으로도 통쾌했고 당당했다.
그녀는 3개월 후 바로 이사를 갔다. 자세한 건 알지 못했지만 골수녀의 정보력으론 집도 월세로 잠시 빌린 것이라고 했고 남편과는 이혼을 한 것 같다고 들려왔다. 그 여자에겐 안타까운 마음도, 그렇다고 용서의 마음도 들지 않았다. 살아오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왔지만 그녀처럼 속을 숨기고 접근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고 그리고 다 큰 성인이, 그것도 아이가 있는 엄마라는 사람이 그런 쌍욕을 하는 사람도 처음 보았다. 돈을 돌려받은 후 난 동네에서 그녀를 언뜻언뜻 본 것 같았다. 물론 확실친 않았고 그녀는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빠르게 사라져 갔다.
첫인상으로, 외모로 사람을 쉽게 판단한 나에게도 책임은 있었다. 내 호감을 그녀도 느꼈을 것이고 그래서 나를 쉽게 주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일을 겪은 후로 타인에게 필요이상의 호의를 베풀지 않게 되었다. 적당한 선이 있는 관계를 유지한다. 아무리 친해도 상대방의 경제적 상황까지는 공유하지 않는다. 성인이라면 본인의 경제적 상황까지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엔 푸라다 카드지갑이 남아있었다. 이번에 큰 몫을 해준 골수녀에게 카드지갑을 넘겨주었다. 골수녀는 “언니 최고!!!”라며 환호성을 질렀다. 사실 카드지갑도 가짜인 것 같다. 골수녀에겐 끝까지 비밀이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믿고 사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