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라스트씬
현실인 듯 아닌 듯... 송기후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돌아가야 했다. 필사적으로 깨어났어야 했다. 그것만이 내 소울, 내 사랑, 내 세상, 락스타를 지키는 단 하나의 ‘열쇠’였으니.
선도부의 장검이 우리에게 향할 무렵 나는 내 모든 것을 걸고 락스타의 팔을 잡아당겼고 그 결과 우리 셋(내 뒤쪽의 가야금 소녀까지)은 장검보다 빨리 쓰러져 도미노마냥 포개졌다.
거친 과호흡을 내뱉으며 눈을 뜨니 눈앞에 송기후 얼굴이 보였다.
“율이 씨!!!!!!!”
그렇게 우린 다시 눈물범벅인 채 다시 만났다.
“하고 싶은 말 못 해서 돌아왔어.”
“응..?”
“사랑해, 송기후.”
송기후는 나를 와락 안았다. 그리웠던 그의 품으로.
“내가 더 해. 그건 알아야 해. 사랑한다, 이율이.”
내가 속한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이젠 정말 여장을 꾸려야 한다. 완벽한 인생은 아니었을지언정 완벽한 이별은 할 수 있잖아.
“고모! 나 왔어, 고모새끼.”
마루에서 나물을 다듬던 고모가 맨발로 뛰쳐나왔다. 이리저리 안색을 살피시더니 꽉 끌어안고 궁디팡팡까지- 그동안 왜 나는 살갑게 찾아뵙지 못했을까..
“아이고, 율이야... 몸은 갠찮은겨~ 아이구... 내 새끼.. 내 새끼..”
언제 들어도 뜨끈한 아랫목 같은 그 말. 내 새끼..
“샥시는 뉘싱겨.”
“기후 엄마입니다. 반갑습니다.”
“시상에... 엄마가 아니라 누이라 해도 믿것어~ 선녀가 따로 없네. 곱네. 고와.”
산골마을에 웃음소리가 번졌다. 고모는 백숙을 할 테니 저녁에 오라고 했다.
송기후 모친은 트렁크에서 접이식 휠체어를 꺼냈다.
“이거 필요할 거 같아서.”
“선녀 맞네, 선녀.”
“고모님, 선녀 여기서 1박 되나요?”
송기후 모친과 고모는 제법 죽이 잘 맞았다.
“그려.. 그려요.”
“너네 좀 쉬다가 와. 난, 고모님 도와드리고 있을게.”
송기후와 그의 아름다운 모친을 조금 더 일찍 알게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나의 크고 작은 변화가 진작에 일어났을 거고 그 멍청한 회사에서 더 빨리 벗어났을 테지. 아니, 계속 근무했다 하더라도 나의 대응 방식은 달랐을 테지.
아파서 돌아가신 울 엄마의 힌트대로 검진 피해 다니지 않고 관리를 잘했다면 이렇게 빨리 내 인생이 저물어가진 않았을 테지. 고모와 외삼촌에게 큰 상처를 주지 않았을 테지...
송기후... 이 사람을 이토록 무기력하게 울게 하진 않았을 테지... 평범하게 늙어가며 애들 걱정, 임플란트와 인공관절 얘기하고 뱃살 타박하며 늙어갈 수 있었을 테지.
“율이 씨.”
내 생각에 빠져 송기후가 한 얘기를 놓쳤나 보다. 꽃들이 한들한들 거리는 시골길을 따라 휠체어를 타고 가는 길에 재차 송기후가 내 이름을 불렀다.
“미안해, 딴생각하느라.”
“어허, 나랑 있는데 딴생각을 해?”
“어머? 그럼 안돼? 딴 남자 생각했는데?”
소소하고 실없는 농담을 해도 삶은 이토록 눈부시다.
“무슨 말했는데?”
“아까 뭐 산 거야? 병원 앞에 상점 들어갔잖아. 나 못 들어오게 하고.”
“기후 씨 선물.”
“내꺼?”
“집으로 택배 보냈어. 나중에 봐.”
돌아보지 않아도 송기후의 표정을 알 것만 같다. 들이키는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걸 보니 그 또한 송기후의 심경 그 자체일 테지. 괜한 말을 했나.. 얼른 나는 화제를 바꿨다.
“어머닌 정말 센스 있으신 거 같아. 어떻게 휠체어 생각을 하셨을까.”
“그러게.”
“기후 씨가 어머닐 많이 닮았어. 외모도, 마음결도.”
“쳇... 사람 놀래키더니 말로 때우긴~”
소소한 날, 소소한 투닥투닥... 이 소소한 것들에 감사한다.
시골집은 여전히 반짝거렸다. 여기저기 쓸고 닦은 고모의 살가운 손길 덕이겠지. 세상의 모든 빛은 공들여야 드러난다.
송기후는 차를 가지러 다시 고모집으로 갔고 그 사이 나는 숙제 하나를 더 해냈다.
“외삼촌... 율이 예요.”
외삼촌이 하도 우셔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저 감사하다고 했다. 당장 한국에 오시겠다 했지만 나는, 엄마와 아빠를 함께 모신 부스에서 외삼촌을 기다리겠다고... 천천히... 오셔도 된다고... 했다. 대신 아주 환하게 방긋 웃는 사진을 보내드렸다.
또 누굴 빠뜨렸나.. 선생님께는 괜히 인사를 드렸었나.. 마음 아파하실 텐데..
락스타가 내게 걸어왔다.
“머리가 아직 연핑크네. 그럼 백숙 먹을 수 있겠다.”
락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보다 너 정말... 미쳤어? 선도부 놈은 나도 버겁다고.”
“그래도 다행이야. 이전에 니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했잖아. 이쁘더라, 천재 가야금 소녀.”
“우리 얘긴 저승길 가면서 해. 시간은 충분하니.”
“그래.. 나 오늘 와인도 마실 거야.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재롱잔치 다 해버릴래.”
“고주망태 돼도 돼. 내가 어부바해 줄게.”
“응.”
백숙을 배불리 먹고 이율이의 재롱잔치가 벌어졌다. 와인을 세잔이나 마셨지만 누구 하나 말리지 않았다. 그냥 그런 날이었다. 간드러지는 트롯에, 율동에.. 고모는 배를 잡고 웃었고 송기후와 송기후 모친도 환한 미소로 날 바라보았다. 우린 아무 일 없듯이, 나의 나날들이 백 년 천년 남은 듯이 먹고 마시고 놀았다. 그들의 웃음 뒤 슬픔을 알아챘지만 나 또한 티 내지 않았다. 그동안 나, 충분히 누렸고 충분히 행복했다.
잠들기 전 송기후는 머리맡에 오르골을 놓아주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거 열어. 목소리 또 안 나오겠다.”
“응. 옆에 누워, 얼굴 좀 보게.”
“왜, 벌써 까먹었어?”
“보고 싶어.”
“그래.”
내일 눈을 떠도 좋고, 아니래도 할 수 없고... 난 마지막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다. 한동안 말없이 송기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내 인생에 나타나줘서 고마워.”
“내 앞집에 이사와 줘서 고마워.”
“클럽에 초대해 줘서 고마워.”
“초대에 응해줘서 고마워.”
“나만을 위한 노래 만들어줘서 고마워.”
“내 노래 좋아해 줘서 고마워.”
“최악의 여친두고 안 도망가서 고마워.”
“이민 간다고 뻥 안쳐서 고마워.”
“고백해 줘서 고마워.”
“받아줘서 고마워.”
“사랑해 줘서 고마워.”
“사랑스러워서 고마워.”
이른 새벽까지 ‘고마워 놀이’가 지칠 무렵 결국 송기후는 잠들고 말았다.
“이율이.”
락스타가 나를 불렀다. 락스타는 근사한 백발로 나타났다.
“오, 락스타... 힙한데~”
“가자, 이율이.”
“응. 먼저 나가있어. 송기후한테 마지막으로 인사할게.”
“시간이 길지 않을 거야.”
나는 송기후 잠든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의 얼굴을 어루었다.
“안녕, 송기후.”
그에게 짧게 입 맞추었다.
“나의 라스트씬이 돼줘서 고마워. 믿을 수 없을 만큼 사랑해.”
락스타와 나는 검은 숲을 걸었다.
“생각해 봤는데 그 선도부 놈 말이야. 대충 겁만 주고 어쩌면 널 봐준 게 아닐까?”
“글쎄, 인간미가 1도 없는 놈이라. 근데 왜 그렇게 생각해?”
“매번 본인이 우세한 상황에서도 져주는 느낌?”
“내가 퇴사신청해서 그럴 거야.”
“퇴사라니?”
“지겨워. 이 일. 너 우주 먼지 될 때 같이 가려고. 이제 2389976호 영구삭제야.”
“......”
“그러니까 이율이. 겁먹지 마. 나랑 같이 가는 거야. 우주먼지로.”
"락스타..."
"동정 금지."
"락스타."
"어허, 걱정 금지."
"그게 아니고 락스타."
락스타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 꽤 잘 살아낸 거 같애. 러닝타임은 아쉽지만."
"맞아. 꽤 괜찮았어."
"니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인간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아. 지가 변하고 싶을 때 변하지. 내가 널 바꾼 게 아니라 니가 널 바꾼 거야."
"락스타처럼 죽고 싶었다고 얘기 했던가."
"어허, 너는 너답게 살았고 너답게 죽었다니까. 니 말년 인생 니가 바꿨다고, 멍충아."
우리의 시답잖은 농담이 검은 숲에 울려 퍼졌다.
나는 웃으며 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소소하게, 시답잖게.
락스타처럼 죽고 싶어 <끝>
>>>에필로그 by 송기후
율이 씨에게 다녀오는 길이다. 율이 씨의 그림책이 나왔기 때문이다. 세 가족의 사진 옆에 책을 전시해 두었다. 이 책은 고모님에게도, 엄마에게도, 미국의 외삼촌에게도, 그리고 서대표에게도 발송했다. 내지 첫 페이지에 [故이율이 씨의 작품집 _당신을 기억합니다.]도 적어두었다.
창가에선 율이 씨가 집으로 보냈다던 선물, ‘풍경’이 바람 따라 살랑거렸다. 그때 함께 보낸 율이 씨의 카드를 펼쳐보았다.
[사랑하는 나의 기후 씨.
난 말야... 생이 다하면 바람이 되고 싶어.
창가에 걸어둔 이 풍경이 살랑이면 내가 다녀간 후일 거야.
내 생각에 함몰되지도 말고
그렇다고 나를 잊지도 말고
어느 한 날 내가 다녀가면 그냥 웃어줘.
나의 찬란한 라스트씬에 송기후가 있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