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구간 진입
곳곳에 등불이 밝혀진 정자의 주변은 장관이었다. 연못의 수면이 도토리묵마냥 찰박거렸고 달빛, 별빛, 등불의 다채로운 빛으로 흐드러진 연꽃이 두드러졌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귀족들과 가야금을 연주하는 소녀의 뒷모습.
“저 사람들 뭐야?”
“사람인지 환영인지 알 게 뭐야.”
“내 꿈이니 하는 소리잖아.”
“내 공간 이기도 해.”
“내 머릿속이라고.”
“그래, 그거. 극장처럼 빌려 쓰는 거라고.
나, 그 정도 지분은 있다고 본다.”
우리는 투닥거리며 정자로 올랐다.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녀는 새하얀 얼굴에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가야금을 탔다. 가족들로 보이는 귀족들이 뿌듯하게 지켜보고 있다. 그들의 화려한 비단옷은 1000년 세월 쯤 족히 거슬러 올라가 보인다. 정자에 오른 락스타와 나도 한켠에서 그 소녀의 연주를 홀리듯 감상했다.
"아는 사람들이야? 본 적이 있거나.."
"인간의 원혼이 저승사자 몇몇에 남아있다고 들었어. 그런데 최근 사자들은 죄다 젤리재질로 만들어지니 인간 원혼은 아마 꽤나 옛날 인물이었을 거야."
"설마 그럼, 락스타 니 전생 아닐까."
"그게 사실이면 단서가 드러나겠지."
그런데 머지 않아 그 단란한 분위기는 박살이 났다. 불청객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검은 옷, 검은 탈을 쓴 살수의 등장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는 단박에 비단 귀족들을 향해 무시무시한 검을 휘둘러댔다.
마지막 남은 가야금 소녀가 공포에 휩싸여 도망치는데 살수는 재빠르게 그 아이까지 베어버렸다. 살수는 우리의 존재는 알아채지 못하고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순식같에 벌어진 상황이라 나와 락스타는 할 말을 잃었다.
“락스타!! 어떻게 좀 해봐.”
둘러보니 락스타가 없다.
“락스타!!”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맙소사.... 가야금 소녀 바로 옆에 쓰러져있는 락스타는 같은 자세, 같은 자상.... 마치 한 몸, 한 인격체처럼...
락스타!!! 하고 깨어난 나는 바들바들 떨었다. 욕실에서 젖은 머리 털고 나오던 송기후가 기겁하며 달려왔다.
“율이 씨!! 괜찮아?”
“락스타가... 락스타가....”
“락스타가 누군데?”
그제서야 정신이 든 나는 고개를 털어댔다.
“아.. 아니야.. 나쁜 꿈 꿨어.. 나쁜 꿈-”
그럼 그 가야금 소녀가 락스타였던 거야? 락스타의 전생을 보고 온 거야? 락스타는 그대로 사라진 거야? 꿈과 현실의 애매한 경계에서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욕실로 들어갔다. 더 이상은 송기후 앞에서 울 수 없기 때문이다. 작은 욕조에 죽은 듯이 늘어져있는 락스타를 발견하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락스타...!!!”
락스타는 나를 아련히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시끄럽다, 니 남친 뛰쳐들어오겠어.”
“어디 봐, 아까 너 다쳤었다고.”
피칠갑되었던 자상 부위를 훑어보는데 락스타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꿈인데 뭘 그리 놀라. 암튼 오버하기는.”
“괜찮아?”
“기분이 이상해.. 그 아이는 나였을까?”
“왜. 뭐 짚이는 게 있어?”
“몰라, 되게 아팠어.”
“뭐.. ?”
“그 소녀가 칼에 베일 때, 마치 내가 베인 것처럼...”
“끔찍한 동기화네...”
“나도 몰라. 그 순간 블랙아웃... 눈 뜨니까 여기야.”
“말로야 '다시 태어나면, 전생이 있다면' 했지만 진짜 그런 게 있는 건가 혼란스럽다. 허긴 니가 나타난 것부터 상식은 틀어져버렸지만...”
“누군가 부러 기억을 이식하는 건지, 아니면 나의 전생이 나를 부른 건지... 모르겠어, 정말.”
노크소리가 크게 들린다. 율이 씨.. 괜찮아..? 하는 송기후의 목소리다. 아마 욕실에서의 작은 소음이 또 문 밖 송기후를 걱정시켰나 보다.
“나가봐. 보시다시피, 암 오케이. 난 좀 쉴란다.”
내가 이렇게 혼란스러운데 락스타는 오죽할까 싶다가도, 남은 내 삶은 현실에 발 딛지 못한 채 제3의 공간에서 붕 떠버릴까 두렵다. 또 잠들어 그 공간에 덩그러니 남겨질까 두렵다.
나와 송기후는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송기후는 마당에서 연어를 먹음직스럽게 구웠고 나는 테이블을 세팅한 후 고모를 초대했다. 고모는 연신 엄지를 치켜들었다.
“기후 총각, 내 평생 이렇게 맛난 생선은 첨이여.”
“남이 해준 밥이 젤 맛있다며~”
“어허이, 그거이 아이고... 참말로 맛난다니께~”
“고모 말투 되게 신기한 거 알아? 할머니랑은 또 다른 거 같고..”
“니 고모부가 타지인이였자네. 둘이 섞여살믄 다 닮는겨. 식성도 닮고 얼굴도 닮고 말투도 닮고 생각도 닮고.”
허긴... 그 말엔 공감백퍼다. 만난지 얼마 안된 송기후와도 뭔가 잘 섞이는 느낌이 있다. 고모 말처럼 식성도, 표정도, 작은 언어습관에 이르기까지... 그러니 평생 함께한 부부라면 더 하겠지.
“아, 고모.”
“잉.”
“김옥선 선생님... 기억나?”
“이 동네 애들 차로 싣고 학교 델다 준 양반?”
“응. 선생님 어머니댁이 저쪽 뒤였잖아.”
“그 분교 없어지고 도시로 갔었는디 얼마 전에 시장에서 봤네.”
“그 집에 오신 거야? 안 그래도 갑자기 선생님 생각이 나더라고.”
“사는 집은 장터 근처라는디 며칠에 한번 씩 올라 오나베.”
“그럼, 율이 씨. 메모라도 붙여놓자. 오시면 보실 거잖아.”
“응.”
송기후가 정리하는 동안 고모를 모셔다 드렸다.
“애비는 잘 모싱겨?”
“응. 이제 두 다리 뻗고 잘 거 같아. 고모, 정말 고마워.. 그렇게 빨리 일을 처리해 주셔서.”
“난 니 에미 한나두 안 미웠응게.”
“알아.”
“어메? 워찌 안대?”
“고모가 울 엄마아빠 결혼사진 줬잖아. 미운 사람 사진을 어떻게 그렇게 오래도록 간직하겠어.”
“미안햐아.. 울 어매 눈엔 느그 애비뿐였어. 우덜 같은 딸내미도 다 이 집에선 다 밥 축내는 밥구신이었다니께. 귀한 아들뿐였어, 니 할매인생은....”
“우리 고모도 속상했겠다. 할머니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해.”
“울 어매.. 돌아갈 때도 느그 애비 이름만 부르셨대니께.”
“불공평해. 평생 옆에서 지켜드린 건 고몬대.”
“내 새끼가 알아주면 됐으.”
“고모가 외삼촌한테도 다 말해줬잖아. 엄마가 내 양육권, 친권 준비했다는 거... 진짜 고마워.
그거 몰랐으면 끝까지 엄마 원망했을 거야.”
이른 아침 산책길에 선생님 댁 문 앞에 연락처와 짧은 메모를 적어두었다.
“같이 학교 다니던 애들은 다 떠난 모양이네. 그 친구들은 안 보고 싶어?”
“안 친했어. 말도 안 섞었거든. 난 낯설어서 그런 건데 걔네들은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나 봐. ‘서울깍쟁이 기집애’ 하는 소린 자주 들었지.”
“같은 차 타고 통학했다며.”
“학년도 다 달랐고... 그땐 내가 고슴도치였거든. 누가 다가오든 다 찔러버렸지.”
그때 파랗고 귀여운 소형차가 대문 앞에 섰다. 운전석에서 내리는 중년의 여인.
“누구..세요?”
“선생님... 이율이에요.”
크게 놀란 선생님은 와락 나를 안아주었다.
“절 기억하세요?”
“당연하지. 우리 고슴도치, 이게 얼마만이야.”
등에 닿는 선생님의 따뜻한 토닥임에 울컥해졌다.
선생님은 직접 담근 모과차를 내어주셨다.
“엄청 멋있는 남자친구도 있던데? 왜 먼저 보냈어.”
“작업할 게 있대요.”
“난 여기 일주일에 몇 번 와. 텃밭도 가꾸고 그림도 그리고.”
그러고 보니, 소박한 집 내부에 화선지에 그려진 동양화들이 가득했다. 난초그림, 능소화그림, 힘찬 서예 등등..
“이게 다 선생님 작품이에요?”
“아휴, 얘~ 작품은 너무 거창하고... 항암 하면서 일도 그만두고 남는 게 시간이라 낙서하는 거야.”
선생님의 삶도 군데군데 보도블럭이 깨져있구나... 짐작했다.
“지금은... 어떠세요?”
“그냥 뭐 더 나빠지지 않길 바라는 거지. 나, 처음 암선고받은 날.. 죽었다, 쳤어. 그다음 날부터 덤이라고 생각하기로. 모든 건 저 하늘에 맡기고 오늘도 신나게 놀자, 예~~ 그러고 살아.”
“저, 여기 자주 올게요. 그림 배우고 싶어요.”
“내가 가르칠 주제는 안되고.... 언제든 와. 화구도 맘껏 쓰고. 테이블 아래 화선지랑 염료 잔뜩 있으니까.”
환히 웃는 나를 선생님은 물끄러미 보셨다.
“맞다, 이렇게 빛나는 사람이었어. 넌..”
“어릴 땐 미웠잖아요. 말도 안 듣고 대꾸도 안 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몇 번 쥐어박고 싶으셨겠어요.”
“쌤 차 안탄다고 실랑이 하느라 단체로 10분씩 지각한 거? 아님, 소풍 가서 숨어버려서 하루 종일 너 찾게 한 거?”
“그런 건 좀 잊어 주시.. 지...”
“달라진 게 아니야. 이율이 넌 그때 먹구름 아래 서있었던 거뿐이야. 그렇게 생각해, 난.”
뭉클... 뭐야..
푸른 하늘과 들꽃이 흐드러진 길을 걸으며 선생님의 그 말을 떠올렸다.
[이율이 넌 그때 먹구름 아래 서있었던 거뿐이야.]
그 말 한마디에 너무 큰 위로를 받았다. 그렇게 발걸음이 가벼울 수 없었다.
저 멀리에 내 사람 송기후가 마중 나와있다. 송기후는 두 팔을 활짝 펴고 나를 기다린다. 나는 제자리에서 통통 튀며 송기후에게 두 팔을 흔들었다.
모든 건 저 하늘에 맡기고 오늘도 신나게 놀자.
YEAH~~~
있는 힘껏 송기후를 향해 달리던 그 순간..
어라? 이게 아닌데...
그 푸르고 이뻤던 내 하늘이 까맣게 변했다. 시야는 아득해지고 여러 개의 소리가 겹쳐 들릴 뿐이다.
바닥에 쓰러지는 퍽 소리, 송기후가 다급히 다가오는 발소리, 목 놓아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
아.. 왜 이래.. 나 이러면 안 돼. 송기후 또 걱정하는데... 그러기 싫은데...
이제 그 겹치는 소리들마저 아득해...
일어나, 깨어나.. 어서..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