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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두란 Sep 16. 2024

'팁'은 거절 안 합니다-

3_ 원하는 스트로크를 주면 흔쾌히 받아들여라


사랑이 날아오면 지체 없이 받으시라!


  세 번째 스트로크 경제 법칙은 '원하는 스트로크가 오더라도 받아들이지 말라.'이다. 이번 편에서는 이 법칙을 타파해 보도록 한다.

  이 세 번째 법칙은 관리자에게 칭찬이 와도 겸손하게 거절하는 것이 예의라고 말한다. 우리는 '잘난 척'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팠던 민족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배 아파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것을 밉게 보려 했던 유교 문화의 결과일까?


어머! 대단하셔요!


  이 한마디를 들으면 나는 열 마디를 내뱉는다. "아니에요, 제가 사실은 이것도 부족하고 저것도 부족해요. 그걸 극복하려다 보니 저절로 이걸 성취하게 되었는데요. 사실은 결핍이 저를 키운 것이에요." 애국가도 4절에서 끝나는데 나는 들어만 준다면 10절까지도 뽑아낼 자신이 있는 사람이다.


  왜 상대가 스트로크를 주겠다고 나서는데 나는 그것을 막아서는 것인가!


  며칠 전에 여섯 살 아들이 어린이집 등원 길에 나에게 물었다. "엄마, 그런데 아빠는 사람들이 나한테 용돈을 주려고 할 때 왜 그걸 막는 걸까? 그 용돈을 받으면 내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살 수 있다는 걸 아빠도 알 텐데 왜 그걸 못 주게 막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키야- 내가 아이한테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기억도 나질 않는다. 내 머릿속에는 내 안에도 아이의 용돈을 막아 세우는 아빠와 같은 존재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놈을 물리칠 방법을 생각하느라 잠시 정신이 나가있었다.


  우리는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명령과 그래도 너무 튀지 않고 잘난 체 하지 않으면서 잘 융화되어 살아가야 한다는 이중구속 속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어중간한 곳에 자리를 잡고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우리 문화에서는 '보통이 가장 어렵다'라는 말이 나온다. 보통에 대한 기준은 없고, 극과 극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만 있다. 1루와 2루에 갇힌 야구 주자처럼 각자의 기지를 발휘해 가며 버텨내야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세 번째 법칙을 타파하는 것이 가장 아프고 힘들었다. 나에게는 '겸손은 힘들어!'가 아니라 겸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래서 매뉴얼을 만든 것이, 누가 나에게 칭찬을 하면 방어 없이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매뉴얼을 갖추고 나니 구질구질하게 나를 깎아내리는 일도 줄었고, 칭찬에 대한 보답을 하느라 상대에게 횡설수설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하는 뻔뻔한 일도 줄었다. 그러고 나니 사람 만나는 일이 조금 편해졌다. 일관되게 친절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도 가능할 것만 같았다. 긴장하고 벌벌 떨며 남에게 맞추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 때문인지 요즘 만나는 사람들마다 "요즘 좀 편안해 보여요."라는 인사를 많이 건네주신다.  



친절은 덫이 아니야-


  나는 왜 남들이 주는 스트로크를 받지 못해 거절하며 나 자신에게 친절하지 못한 사람이 되었던 걸까? 곰곰 생각해 보면 타인이 주는 칭찬이 나의 노력을 멈춰 세울 것이라는 두려움과 타인이 주는 칭찬에는 어떠한 부탁이나 용무가 뒤따를 것이라는 경계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쉬지 않고 노력해서 끝이 있는지도 사실 모르겠지만 어딘가를 향해 무작정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나에게 '성공'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저 '성공'해야 한다는 목표만 가지고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다. 보육교사 자격증을 손에 쥐고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인 국공립 어린이집 원장을 30대에 해내고 나니 목표 설정이 새롭게 필요했다. 그제야 남들이 나에게 주는 칭찬이 들리기 시작했고, 멈춰 서서 나 자신에 대해 알아가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를-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는 것보다는 그냥 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쉬지 않고 빠르게만 달렸다 보니 추억이 별로 없다. 추억이 없다는 것은 행복했던 기억이 별로 없었다는 것과 같다. 교사로서, 그리고 원장으로서 지낸 지난 15년을 되돌아보면 고생했던 기억들만 간간이 떠오른다. 열심히 하지 않고 그냥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만 둘 생각 없이 오래 이 일을 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나 자신이 행복하기를 왜 그렇게 경계했을까?


'멈추지 마, 그런 말은 듣지도 마. 넌 아직 멀었어-'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관리자들이 모인 회의 자리에 나가면 첫 만남의 시간은 여기저기에서 칭찬과 거절의 파티가 열린다.



"원장님,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화장안하면 밖에도 못 나가요."

 


"좋은 소식 들리더라고요! 축하해요!"

"아~ 아닙니다. 운이 좋았어요."



  칭찬이 오면 좀 받자. 그냥 받자! 칭찬을 오는 대로 잘 받는다는 것은 타인이 나를 인정하는 내용에 대해 나 또한 동의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남도 나에게 좋은 소리를 하는데, 왜 나는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타인이 주는 칭찬에 대해 경계를 넘어서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립서비스'라는 용어를 생활 속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는데,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 용어가 된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어디 가겠는가?

  나는 초면에 너무 친절하게 다가오는 사람도 두렵고, 평소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갑자기 친절하게 구는 사람도 두렵다. 나에게 부탁할 일이 있나? 하는 의심부터 하게 된다. 종종 나의 의심이 맞아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던가. 호구로 살고 싶지 않은 나는 칭찬이 덫일까 항상 의심을 한다.


  '받지 말자, 저건 분명 달콤한 독(毒) 일 것이야-'


  칭찬에 대한 나 자신에 대한 경계와 타인에 대한 의심. 이것들이 나에게 날아오는 건강한 칭찬도 필터링해 버리는 독이 되었다. 항암제가 암세포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세포도 죽이는 것처럼 칭찬에 대한 경계와 의심은 정작 나를 일으켜 세울 스트로크도 거절하는 문제를 낳고 말았다.


  

저 그런 사람 아닌데요?


  종종 스트로크를 겸손하게 거절하는 것을 넘어서 상대방과 싸울 듯이 덤벼들며 상대가 주는 칭찬을 반박하고 있는 날들이 있었다. (이 기회를 빌어 그날의 무례함을 사과드립니다-) 칭찬 한 번 했다가 100분 토론에 참여하게 된 그들은 얼마나 짜증 났을까? 진절머리가 난 그들은 아마 다시는 나에게 칭찬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 자신이 되게 싫은 날이 있다. 자기 비난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혼자 있으면 그럴 일도 없었겠지만 바깥일이 있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칭찬을 받아내야 하는 일이 많았다. 그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나는 나 자신에게 쓴소리를 하고 있는데, 바깥에서는 칭찬이 들려온다. 나 자신에게 비난을 퍼붓던 목소리는 신이 나서 나에게 칭찬을 해 오는 상대와 싸우기 시작한다. 상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나에게 칭찬으로 일관된 공격을 벌일 수도 있고, 왜 칭찬도 못 받고 이 난리냐고 화를 낼 수도 있다. 혹은 나를 통해 무력감을 느끼고 상대 또한 자기 비난의 수문을 열 수도 있다.


  나는 왜 그렇게 내가 싫었을까? 사실 나는 나 자신을 자랑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타인으로부터 내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칭찬받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면의 어린 나는 어떻게 칭찬을 요구할 수 있는지도, 어떻게 나 자신을 자랑하는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스트로크가 필요했지만 아무리 돌아봐도 내가 필요할 때 나에게 필요한 스트로크가 적절하게 날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대신 캄캄하고 외롭고 추운 곳에서 들려오는 것은 낯설고도 익숙한 체념의 목소리였다.

'어떻게 원하는 걸 다 받고 살아? 그냥 버텨. 적응해. 그게 나아! 헛된 기대를 품고 사는 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어. 그냥 없이 살아. 마음을 비우면 편해질 거야.'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소문난 잔치에 먹을  없더라- 하는 속담들은 여러 사람의 입을 거쳐 나에게 심어졌고, 순응적인 나는  씨앗에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튼튼하게 키워냈다. 성공해야 하는 것은 기본값이고 거기에 겸손과 성실함이 더해져야만 어디다 명함이라도 내밀  있다는 신념에 지배당했다.


  문화가 만들어 낸 명령에 사람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복종한다. 그 무거운 명령은 학교와 가정에서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교사와 부모의 목소리를 빌려 전해지기 때문에 감히 어린아이들은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따져볼 여유가 없다. 가장 빠르게, 가장 많이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아이가 인정을 받고 사랑받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목소리를 미워하지는 않는다. 비겁하게 아이들에게는 세상의 전부인 부모와 교사의 목소리를 빌려 세상을 순응과 복종으로 통제하려고 했던 '문화'를 탓한다. 그리고 그 문화에 보란 듯이 복수하고 싶다.

  나에게 그 복수는 소심해 보일지 몰라도 칭찬이 날아오면 방어 없이 받는 것이다. 남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대단한 복수이다.

  




팁을 주고 싶은 마음 수용하기


  좋은 서비스를 받고 나면 어떤 방식으로라도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어린이집의 관리자인 나는 학부모님이나 교직원으로부터 그러한 심리적 '팁'이 날아와도 "이제 마땅히 저의 일인걸요.", "월급 받았으니 일해야죠."라는 말로 내 노력과 수고를 깎아내리곤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믿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팁을 받았을 때 '아, 저 월급 받으면서 일해요. 팁 안 주셔도 됩니다.'하고 거절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급여는 급여이고 칭찬은 칭찬인 것이다.

  

  돈으로 계산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서로의 노동에 대해 사회가 정한 기준의 급여로 보답을 받지만 마음으로도 주고받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긍정적 스트로크이고 정확하게 주고받아야 하는 양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는 것도 아니고, 준 만큼 돌려받아야 손해보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저 주고 싶을 때 주고, 받고 싶을 때 받으면 되는 마음의 힘이 되는 인정자극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심리적으로 팁을 준다면 거절하지 말고 냉큼 받자! 냉큼 받아 마음을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서 자신의 삶을 잘 살아내는 데 유용하게 사용하자-


난 엄마가 늘 베푼 사랑에 어색해
그래서 그런 걸까 늘 어렵다니까-
잃기 두려웠던 욕심 속에도
작은 예쁨이 있지-
난 지금 행복해 그래서 불안해
폭풍 전 바다는 늘 고요하니까
불이 붙어 빨리 타면 안 되잖아
나는 사랑을 응원해-

혁오 'TOM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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