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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두란 Sep 23. 2024

친절은 '셀프'입니다-

5_ 자신에게 원하는 스크로트를 마음껏 주어라


내가 준 인정도 유효합니다 :)


  다섯 번째 스트로크 경제 법칙은 '자신에게 스트로크를 주지 말라'이다. 이번 편에서는 이 법칙을 타파해 보도록 한다.

  이 다섯 번째 법칙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주는 스트로크는 '무효!'라고 외친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과도하게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쓰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젊음을 바친다.

  타인과 사회에서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을 가꾸고 노력하는 것을 전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타인과 사회가 주는 인정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은 고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타인이나 사회는 내 뜻대로 통제하기가 어렵다. 내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 타인과 사회가 줄 인정을 기대하고 그것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은 자율적인 삶, 살맛 나는 삶이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넌 내가 뭘 원하는지 몰라!'


    그렇다. 남은 잘 모른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스트로크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줄 때 가장 효과적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사는 것이 어렵다. 대신 타인이나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아주 열심히 살아간다. 그래야만 하는 것인 줄 알았다. 집에서는 부모가,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직장에서는 상사가 칭찬을 해주어야 내가 괜찮은 사람인 것 같은 기분 좋은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관리자 자리에 앉으니 아무리 둘러 보아도 나에게 스트로크 줄 대상이 보이지 않았다. 선배 관리자들? 시청? 지역사회? 학교? 도무지 누구에게 스트로크 지로를 발송해야할지 모르겠었다. 대신에 스트로크를 줘야 할 곳은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관리자는 아무리 일을 잘해도 칭찬해 주는 사람이 없다. 관리자는 당연히 다 잘하는 줄 알고, 뭐든 쉽게 하는 줄 아나보다. 쉽게 해낼 수 있는 일들이 많지만 관리자에게도 어려운 일들이 있다. 하지만 관리자라는 직급은 조직에 단 한 명이기 때문에 관리자가 어떤 노력을 해서 무엇을 해냈는지를 직무가 다른 직원들이 쉽게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관리자의 자리는 고독하고 외롭다고 하나보다. 그렇기 때문에 관리자는 더욱이 스스로에게 스트로크를 잘 줄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스크로크로 나를 채울까?


  스스로 스트로크를 줘서 마음의 힘을 채워보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다음 할 일은 내가 원하는 스트로크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스트로크에는 조건적인 것과 무조건적인 것이 있다.


  조건적인 스트로크는 자신의 노력이나 성과 등에 대한 인정이다. '전자문서를 다루는 게 낯설었지만 이것도 자꾸 하다 보니 잘하게 되네.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잘 적응해 낸 나 자신이 대견해!' 이와 같은 조건적 스트로크는 관리자에게 앞으로도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는 일에 더욱 힘을 쓰게 만든다.


  무조건적인 스트로크는 나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인정이다. '내가 일하는 이곳은 곳곳에 나의 철학과 애정이 묻어나 있어.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남들보다 뛰어나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나에게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해.' 이와 같은 무조건적 스트로크는 관리자가 자신의 조직과 직권에 감사하고 만족하게 해주며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스트로크들]

"오늘도 많은 일을 해내느라 수고했어."

"늘 건강하게 있어줘서 고마워."

"쉬었다 하자. 천천히 한다고 게으른 건 아니야."

"많은 역할을 해내는 나의 능력은 정말 대단해!"

"그 어려운 일도 결국 해결해냈구나. 존경해!"

"오늘은 특별히 좋은 음식을 먹자, 나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

따뜻한 손길로 내 몸을 마사지 하기




  나의 경우는 타인과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조건적인 스트로크에만 집중을 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무조건적인 스트로크가 주는 안정감과 힘을 간과했었다. 어쩌면 우리는 존재 자체로도 서로에게 대단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당연히 곁에 있고 매일 얼굴을 마주하기 때문에 상대의 소중함을 잊고 살기 쉽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 또한 그렇다. 목숨이 붙어 있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큰 병이 없다 보니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감사함을 잊고 산다.



오늘도 깨어나 줘서 고마워-


  나는 아침에 잠이 깨면 의식적으로 나 자신에게 '오늘도 깨어나 줘서 고맙다.'라는 인사를 보낸다. 그리고 몸을 조금씩 움직여 깨운다음 주방으로 가 매일 아침 먹어야 하는 약 6알을 입에 털어 넣는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담임 겸직 원장으로 매일 7시간의 보육과 2시간의 사무를 보고 칼퇴하여 어린아이를 돌보고 육퇴와 함께 다시 출근하여 밤새워 서류를 했던 1년을 보내고 나니 내일 죽는다 해도 이해가 되는 몸 상태가 되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출생 후 세 번의 수술을 했던 아이에게 또 한 번의 개복 수술을 해야 하는 응급상황이 벌어졌고, 나는 와라락 무너져 내렸다.


  두 돌이 된 아이의 수술로 인해 병원과 어린이집을 왔다 갔다 하며 일을 이어갔고, 아이가 회복하고 나자 나는 한 달 급여에 맞먹는 돈을 들여 건강검진을 했다. 그렇게 건강검진을 해서 나온 결과서를 갖고 찾아 간 내과에서는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을 한 다발 안겨주었다. 약 덕분에 살고 있다.


  나는 꽤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편이다. 도무지 자기 자신이라고는 들여다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렇게 억척을 떨어 34살에 얻은 자리가 국공립 어린이집 원장이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자리에서 일하랴 애 키우랴 살림하랴, 거기에 욕심도 많아 공부까지- (다행히 그 공부가 나 자신을 분석하는 공부였기 때문에 이제라도 가속 페달에서 발을 뗄 수 있게 된 것 같다.)


  내가 있기에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도 존재하는 것이고, 내 직장과 좋은 직원들도 곁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사라진다면 이 모든 것들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닌 게 된다. 그런데 왜 나는 나를 돌보지 않았을까?



내가 존재해서
모든 것이 존재하는 거야-


    문제의 원인이 궁금하지는 않다. 그냥 지금부터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가득하다. 나는 꽤 다정한 부모 밑에서 안전하고 건강하게 잘 자랐고, 애정이 넘치는 남자를 만나 오랫동안 연애하고 결혼도 해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 그냥 나만 조금 더 잘하면 될 것 같다.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원하는 스트로크를 잘 주는 삶! 그것이 내가 앞으로 원하는 삶이다. 굳이 원장을 그만두면서까지 나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 일에 몰입해보고자 한다. 잠시 관리자 자리에서 내려와 나 자신을 관리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성급하게 조건적 스트로크만 추구하며 살아왔던 나에게는, 나라는 존재 자체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무조건적인 스트로크로 꽉꽉 채워질 시간! 안식년- 그게 필요했다.


  하지만 모든 관리자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겠노라고 몇 년씩 직무를 쉬어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관리자들은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스트로크를 줄 수 있을까?



목표가 분명한 폐쇄의 시간을 갖자-


  빽빽하게 심긴 해바라기 밭의 해바라기들은 모두 한 곳을 향하고 있다. 햇님! 해바라기에게는 따뜻한 햇님이 스트로크의 원천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관찰해 보면 해바라기는 튼튼한 줄기로 몸을 지탱하고 땅에 뿌리를 내려 흙에서 물을 빨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스로 열심히 물을 끌어올리는 중이다. 타인과 사회로부터의 스트로크만 인정하고 바라며 산다면 해가 뜨지 않는 날은 우울하고 외롭고 괴로울 것이다. 언제나 자신을 마르지 않게 하려면 스스로 스트로크를 주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자신에게 스트로크를 주는 시간은 폐쇄적인 시간일 가능성이 높다.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에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명상을 하는 사람, 요가를 즐기는 사람, 글을 쓰는 사람, 혼자만의 요리를 해서 품위 있게 먹는 사람, 달리기를 하는 사람, 가드닝을 하거나 청소를 하는 사람- 그들이 '타인이나 사회로부터 어떻게 하면 인정을 더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명상과 요가와 글쓰기와 요리와 달리기 등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에게서 타인과 사회를 비워내는 폐쇄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채워질 수 있다.   


  나의 경우는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에게 스트로크를 준다.


2024.07.03

-집밥-

저녁밥을 딱! 차리는 순간, 나의 하루 업무는 끝난다!
요기까지, 내 임무! 밥 숟가락을 뜨면서 마음을 놓는다.
오늘 원장 연수가 있었는데, 각자 하루에 해내야 하는 일을 다 적어보라고 하였다. 나는 "강사님, 육아도 일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강사님께서는 육아도 일이라고 하셨다.
육아와 살림까지 일의 범주에 들어간다면 나는 지금 너무 불쌍한 사람이다. 칼퇴 후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간 육아와 살림은 일이 아니라고 쳐주면 좋겠다.
오늘도 여러 역할을 하느라 수고한 나를 칭찬한다-
2024.05.21

-수용-

내가 처한 상황을 수용한다는 것은 기대와 환상을 걷어내고 현상이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내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타인이 수용되지 않을 때에는 타인을 보는 나의 기대와 환상을 알아차리고, 자신이 수용되지 않을 때에는 자신에게 갖고 있는 기대와 환상을 알아차려보자.

기대에 가 닿으려면 마땅히 시간이 필요하고,
환상이 이루어지려면 큰 운이 따라줘야 한다.
현실에 발을 딛고, 그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내자.
그것이 수용인 것 같다.

나는 요즘 나 자신이 참 좋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 탓도 좀 덜 한다.
나를 수용하고 있는 중이다 :)


  주로 인스타그램에 사진과 짧은 글을 남기며 나 자신에게 스트로크를 주고 거기에 달리는 '좋아요'와 '댓글'로 타인으로부터의 스트로크도 덤으로 얻는다.


  어떤 방식이든 좋다. 자신을 위한 자신만의 스트레스 킬러를 만들고 자신을 옥죄여오는 책임감과 부담감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사랑과 자신감으로 마음을 채우는 시간을 가져보자. 이미 방전이 된 전자기기는 충전을 시작해도 부팅이 되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나의 지인들은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휴대전화마저도 충전을 제때 못하는 문제를 갖고 있다.) 그러니 의식적으로 충전하고 채워가며 살자- 얼마의 힘이 남았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버텨낼 수 있는 데까지 몰아붙이자는 마음으로 자신을 소진하지 말자. 소진의 끝에는 성장이 아닌 재만 남아 있을 것이다.



내 인생각본의 가장 중요한 관객은
나 자신이다.


  며칠 전 유튜브 '최재천의 아마존'을 보는데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서은국 교수님의 말씀이 깊이 다가왔다. 인생도 일종의 연극이라 한다면 관객을 생각하며 살아갈 것인데,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 "인생에서 어떤 관객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라는 질문을 했더니 "self"라는 답변이 압도적으로 높았다고 했다. 나에게도 똑같은 질문이 와서 타인이나 사회, 초월적인 존재(신), 자기 자신 중에 어떠한 관객을 생각하며 삶을 살아가고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어떠한 대답을 했을까? 과거에는 타인이나 사회를 관객으로 삼고 살았지만 이제는 나 자신을 관객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을까?


  자기 자신에게 스트로크를 주는 일은 인생이라는 자신의 연극 무대 앞에 가장 좋은 의자를 두고 거기에 자기 자신을 앉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기 자신에게 스트로크를 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자.  




배고플 땐 이 노래를
아침사과처럼 꺼내먹어요-
피곤해도 아침 점심밥 좀 챙겨 먹어요-
그러면 이따 밤에 잠도 잘 올 거예요-
힘들어요 아름다워서
알아봐 줘요 나를
흘려보내지 마요 나를
사랑해 줘요 날날

Zion.T '꺼내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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