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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혜정 Nov 29. 2024

샤론의 꽃은 무궁화?

관계를 통한 믿음

 뉴베리 문학상(미국의 아동 문학상) 수상 작가 린다 수 박의 '내 이름이 교코였을 때(When my name was kyoko)'는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두 남매의 삶을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후, 태극기를 없애고 우리말은 물론이거니와 이름도 일본어로 개명해야 했던  옛 한국인들의 서사가 아이들의 시선을 통과하면서 때론 슬픔으로 때론 비장함으로 마음을 울립니.


 일제의 무궁화 탄압이 시작되면서 거리에서 무궁화가 뽑혀 나가고 그 자리를 벚꽃이 채우게 됩니다. 이때, 열 살 순희는 가족들과 함께 몰래 집안에 무궁화를 숨겨놓고 키우기로 결심합니다. 발각의 위험을 무릅쓴 이들의 은밀한 공모는 마음속 뜨겁게 뿜어져 나오는 불꽃, 바로 애국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소설 초반부에 샤론의 장미(The rose of Sharon)라는 어구가 나오는데요, 성경에서 말하는 샤론의 꽃이 한국의 나라꽃인 무궁화라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움찔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중동지역의 무궁화가 현재 우리나라에서 피는 무궁화와는 다른 종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접시꽃과 헷갈렸다는 설이지요. 어찌 되었건 엄밀하게 따져 묻지 않는다면 샤론의 장미는 무궁화로 번역되어 영소설에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무궁화 vs. 접시꽃




아가서 2장: 샤론의 꽃



나는 샤론의 수선화(장미) 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아 2:1)


 아가서(Song of Songs)는 솔로몬이 젊은 시절에 쓴 구약 성경의 하나로 '우아한 노래',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을 가진 시가서입니다.  후궁 700명, 첩 300명을 거느린 이스라엘 전성기 시대의 왕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주고받는 사랑의 대화인데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왕의 사랑을 받은 여인이 도대체 누구였을지 궁금합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각종 화려한 배경과 수사를 두르고 있지 않은,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비천한 포도지기였다고 합니다. 아가서에서 나타난 솔로몬은 예수님을, 그 사랑의 대상인 술람미 여인은 인간을 상징한다고 하는데요, 이 관점에서 보면 하늘 보좌를 포기하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죄인인 인간을 사랑하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아가서는 예수님과 교회(인간)의 사랑 관계를 은유적으로 노래한 시인 것이지요.



 아가서 2장 1절에서 솔로몬의 사랑을 담뿍 받고 있는 술람미 여인은 스스로를 샤론의 장미요 백합화라고 칭합니다. 여기서 '샤론'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샤론'은 히브리어로 '평평한 지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실제 샤론 평야라는 곳이 존재합니다. 이곳은 서아시아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요충지로서 이스라엘의 서쪽에 위치한 지중해 연안의 욥바에서 갈멜산 남부지역까지 이르는 해안 평야 지대를 말합니다. 이 지역은 날씨가 따뜻하여 들꽃이 많이 피어나 향기가 진동하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해요. 그 들풀이 바로 샤론의 꽃인 것이지요. 결국, 찾아보기 힘든 귀한 꽃이 아니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꽃을 말합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자신을 '샤론의 꽃'이라 겸손하게 표현하였던 것이지요.



비옥한 초승달 지대 vs. 샤론 평야(출처: 위키백과, 미션 월드넷)


 '샤론의 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샤론의 꽃 예수>라는 찬양이 대표적으로 떠오릅니다. 아가서 2장 1절에서 따온 말이겠지요. 이 찬양의 가사는 우리 마음 안에 예수님이 샤론의 꽃처럼 피어나 향기 나기를 바라는 내용입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야생 들꽃처럼 우리와 친근하면서도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는 예수님을 소망하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죄의 문제로 가로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자유를 누리는 것, 비본질적인 삶의 다양한 문제들과 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등 예수님은 우리의 내외적인 평화와 평안을 찾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얻은 이 자유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사랑이고요. 목숨을 내어 놓는 사랑을 받은 존재인 우리는 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채워지고, 또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갈 5:13)




흔하지만 흔하지 않은: 관계를 통한 믿음



 소설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는 각별했던 장미꽃과의 관계로 가슴앓이를 하다가 자신의 별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여러 별들을 여행하던 중 마지막으로 지구에 도착하게 되는데요, 온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꽃이라고 생각했던 장미가 지구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풀숲에 엎드려 통곡하게 됩니다. 지혜로운 여우가 관계의 의미를 가르쳐 주기 전까지 진정으로 서로를 길들이는 비밀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나에게 넌 아직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명의 소년일 뿐이야.
그래서 난 널 필요로 하지 않고
너도 날 필요로 하지 않아.
너에게 난 수많은 다른 여우들과
똑같은 존재일 뿐이지.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될 거야.
난 너에게 이 세상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야...



   '예수'라는 이름은 그 당시 우리말로 따지면 '철수'와 같이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길가에 흔히 피는 들꽃처럼 너무나 평범하여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일 수 있었지요. 더군다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수많은 신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면 그리 특별할 것도 없고요.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샤론의 꽃'이 되는 이유는 관계 맺음 때문입니다.



 보통의 신들은 먼발치에서 숭배하는 대상,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동떨어진 세계로 초월한 존재, 일 방향으로 복과 벌을 내려주는 권위의 상징입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은 볼품없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에서부터 창녀, 세리, 문둥병 환자 등 소외자들을 섬기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에 이르기까지 상식밖의 삶을 사셨습니다. 전 우주의 통치자가 인간으로 낮아져 오시다니요. 오직 사랑을 위한 희생이었습니다. 함께 울고 웃으며 삶을 나누고 관계를 맺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지요.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처럼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면, 그는 무의미한 몸짓이 아닌, 꽃이 되고 잊히지 않는 눈짓이 됩니다. 눈으로, 귀로 흘러들어 오는 수많은 자극들이 인식의 망을 타고 들어오면 더 이상 흘려버릴 수 없는 소중한 '무엇'이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존재 중 하나가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하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는 쌍방의 관계를 통해 맺힙니다.



 관계는 상대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더 견고하게 하는 열쇠입니다. 서로를 위한 마음씀, 시간 씀, 애씀이 관계의 기본이라면 씀씀이의 정도와 범위에 따라 믿음의 밀도와 폭은 분명히 달라지게 됩니다. '난 도저히 안 믿어져!'라고 한다면, 그리고 '믿어 보고 싶어!' 라고 생각 한다면 멀찍이 떨어져만 있지 말고 관계를 가꾸기 위해 다가가 보는 건 어떨까요? 내민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다 보면 분명히 믿음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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