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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의 발리

롤러코스터를 탄 두 번째 여행

by 위혜정

내 생에 두 번째 발리행 여행이다. 10년 전, 남편과 단둘이 여행하며 예상외로 큰 만족감을 주어서 다시 방문하고 싶은 여행지 1순위가 된 섬.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꼭 함께 오고 싶다는 기대를 품었는데 10년 만에 그 꿈이 현실이 되었다. , 반쪽짜리 실현이라는 반전이 있다. 남편과 함께 오기 위해 준비했는데 회사의 갑작스러운 빌런 본능의 폭주로 인해 비행기, 호텔 취소 수수료만 고스란히 떠안고 아들과 나만 비행기에 탔다. 나 홀로 아이와 함께하는 해외여행은 처음인지미지의 영역에 대한 불안이 치솟았다. 아이가 국제 미아가 되면 어쩌나 하는 쓰잘대기 없는 걱정에서부터 아이의 유일한 보호자인데 몹쓸 건강이 해외에서 버텨줄지에 대한 불길함까지 온갖 암울한 가상의 시나리오 속에서 마음이 복잡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발리 여행은 언제 그 직전까지 악조건의 상황에서 진행된다. 마법처럼 여행이 터닝 포인트가 되어 귀국 후, 새로운 역사를 썼던 첫 번째 여행처럼 두 번째 발리행 역시 출발 전부터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난생처음 CT 촬영을 감행해야 했고, CT의 결과를 비행기 출발 바로 전날에 들어야 했다. 오묘한 병원 스케줄을 마주하며 한숨이 나왔다.


'아, 이번 여행은 남편이 먼저 발목 잡히더니 나 역시 못 갈 수도 있겠구나...'


CT의 결과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 있는 안갯속을 걸으며 비관론에 잠다. 여행을 취소해야만 할 것 같은 예견 사인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추락할 비행기를 타지 못하게 하는 건가? 10년 전 발리를 뒤흔들었던 쓰나미가 다시 몰려올 터라 우릴 막는 건가? 여행을 감행하면 안 될 것 같은 여러 가능성들이 머리를, 아니 가슴을 마구 흔들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들떠 있던 아들만 울상이 되게 하는 건 아닌지, 불행의 씨앗을 뽑아내기 위해 감내할 당연한 대가인지 등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는 바람에 에너지의 탈진이 꽤나 컸다.


사람의 심리는 강한 작용력이 있다. 우울한 생각을 하니 숨이 차오르며 정말 폐암환자 같은 절망감에 마치 폐가 명을 다해가는 것처럼 들숨과 날숨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멀쩡하게 건강하던 사람이 암진단을 받으면 몇 개월 만에 사망에 이르게 되는 그 절망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 이상 없이 숨을 내쉬는 모든 사람들이 부럽기 그지없다. 똑같은 공기를 들이마셨을 텐데 저들의 폐는 어떤 기제로 멀쩡하게 작동할 수 있을까? 소리 소문 없이 서서히 망가져버린 내 몸속의 한 기관을 놓고 그래도 이만해서 다행이지의 안도감에서, 왜 이렇게 까지 되었을까의 비통함 사이를에서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CT 촬영 전, 교수님의 예상하고 계시는 병이 확진이라면 온전한 치료제가 없어 평생 추적 관찰을 해야 하는 것 자체가 우울했다.


드디어 비행 하루 전, 떨리는 아니 두려운 마음으로 CT 결과를 듣기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염증이 심하면 입원 치료 내지는 주사 치료도 감수해야 한다는 사전 정보가 마음의 근심을 더했다. 이날 따라 예약 환자들의 진료가 밀려서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길다. 간절한 기도의 때를 포착하고 눈을 감았다. 운명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기에 어떤 결과도 겸허히 받아들이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기도했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건강에 자부했던 교만함이 얼마나 무참히 패대기쳐질 수 있는 지를 목전에서 직접 겪으면서 이제는 건강 관리를 최상위 과제로 둘 것을 단단히 마음먹었다.


드디어 진료실 입실. 동일한 질병의 환자들을 워낙 많이 보신 경험 때문인지, 특유의 낙관주의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교수님과의 대화는 마음의 부담을 확 덜어 주었다. 균을 배양하려면 한두 달은 더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정확한 확진을 하기 위해서는 3월에 다시 병원에 오라신다. 토요일 진료가 없으신 터라 그 바쁜 학기 초에 조퇴를 감수해야 하다니 뭐, 어쩔 수 없다. 다행히 폐의 염증이 경미하기 때문에 기침을 유발하는 것은 감기 때문인 것 같다고 하신다. 감기약도 먹을 필요가 없다고 하시다니 진심 낙천주의자이시다. 비행기 여행을 포함해서 모든 일상생활이 다 가능하다고 하시는 그 선언이 마치 하늘에서부터 보내진 한 번의 기회인 것처럼 눈물 나게 감사했다. 확진 전, 한 두 달의 유보 시간만큼은 기필코 면역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나의, 그리고 남편의 과제가 되었다.


바닥까지 치고 재도약할 수 있는 발판 같은 곳 발리, 뭔가 주술적인 힘이 있는 섬 맞는 것 같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무거운 짐을 잠시 살짝 내려놓고 아들과 함께 발리로 향했다. 따뜻한 기후와 맑은 하늘로부터 뿜어 나오는 깨끗한 공기여, 나의 폐를 돌고 돌아 불순물을 완전히 정화시켜 주실. 좋은 기운을 얻고 갈 수 있도록 도와다오.


난생처음, 미성년자 아들과 함께 하는 단독 해외여행이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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