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제 Oct 24. 2021

삐에로 이야기

언제 다시 돌아와 현관문을 열면 엄마의 얼굴을 한 채 웃으며......

그 모순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아직 내가 순수했을 때 나는 순수를 모르고, 스스로에 대해 순수했다 말하려면 오로지 과거형으로밖에는 서술할 수 없다는 모순 말이다. 기억하기로 나는 나무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는 아이였다. 안녕 나무야! 너 어제 어땠니. 난 좀 짜증나는 일이 있었어... 그런 한편 순진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친구들에게는 내가 나무에게 몰래 말을 건다는 사실을 숨겼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단지 일반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내가 구성돼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나에 대한 가장 이상한 사실을 지금 말하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10년 전 심리상담을 받을 때도 언급하지 않았다. 혹시 이 이야기를 하면 어떤 병명의 증상이라고 짐작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분류되지 않을까 겁이 났다. 지금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괴로운 일의 이야기적 은유라고 해석되는 것도 곤란했다. 그건 단지 내 몸 어딘가 어떤 흔적으로 남아있는 동떨어진 일이었으니까. 그건 눈에 보이는 무엇은 아니었지만 종종 앗 따가! 하고 내 안에서 나를 찌르는 어떤 기이함이니까.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에 대해 길게 상담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당시엔 이 이야기에 대한 탐구보다는 한뼘이라도 더 도움이 되는 조언이 필요했다.


최초의 기억까지는 아니지만 최초라고 여겨질 정도로 어렸을 때의 기억이다. 나는 차에 타고 있었고, 차는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고, 앞 좌석에 앉아있던 이모가 불쑥 내 눈 앞에 분홍색 삐에로 인형을 건네던 순간의 기억. 인형의 눈은 빨간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작게 박혔고 나는 첫 눈에 그 인형이 너무 불쾌했는데 그건 두려움에 가까웠다. 나는 인형을 무서워했다. 인형 안에 굉장히 무서운 인격이 숨어있다고, 내가 자는 동안을 틈타 벌겋게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수많은 밤을 설쳤었다. 마침 그 인형을 받기 며칠 전, 동네에서 같이 놀던 언니가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라며 무거운 목소리로 삐에로 인형 이야기를 들려준 참이었다.


내 친구의 친구가 해준 얘긴데. 어느날엔 엄마가 연락이 너무 안 돼서 막 갑자기 가슴이 뛰더래. 너무 무서운 기분이 들어서 막 집에 달려갔는데 삐에로 인형이 집안 식구들을 다 죽이고 엄마처럼 분장을 해서 어, OO이 왔니? 어서 들어 와, 하면서 막 웃었다는거야. 그 이야길 들은 날에도 잠을 설쳤는데 마치 운명처럼 바로 며칠 후에 이모가 그 인형을 내게 건넨 것이다. 이모의 얼굴은 굉장히 무거웠다. 뒤를 돌아보며 어서 받아, 하는 이모의 찌푸린 미간과 어두운 눈빛에 마치 무슨 일이 곧 일어날 거라는 암시가 숨어 있는 듯 했다.


나는 대번에 그 인형을 받기 싫다고 했는데 이모는 강압적이었고, 엄마는 순진한 얼굴로 내 침대를 내려보는 곳에 삐에로 인형을 앉혀놓았다. 그 후로 나는 매일 삐에로 인형의 눈치를 보며 지냈다. 계단을 세 번만에 내려오지 않으면, 집에 오후 4시 15분까지 들어오지 않으면, 오른발, 왼발, 왼발, 오른발 순으로 걷지 않으면... 이상한 주문에 걸린 듯 했고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내디딜 수 없었다. 무엇보다 심각하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설핏 잠이 들었다가도 눈을 떠 숨 죽여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촉각을 기울였다. 너무 걱정스러운나머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 그때 뇌 한 구석 어딘가가 망가져버렸는지도 몰랐다.


나는 삐에로 인형에게 눈은 마주치지 못하면서도 짐짓 딴청을 피우며 마음 속으로 계속 빌었다. 삐에로님.. 제가 말을 잘 들었죠? 삐에로님, 저희 엄마 살려주실거죠? 저 삐에로님이 착한 분인 걸 알아요... 엄마에게 이 모든 사정을 말할 순 없었다. 사건의 일단을 말하는 순간, 삐에로 인형의 눈이 반짝이고, 너, 죄를 지었지. 내가 손 쓰기도 전에 총총 튀어나가 방 문을 쾅 닫아버리고, 나는 문을 열고 비명을 지르고... 그건 아직 적절한 언어를 갖지 못한 채 겪은 첫번째 모순이었다. 침을 꿀떡 삼키고 순수한 얼굴로 계속 비는 수밖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엔 엄마가 아주 멀리 있는 사람 같았다. 엄마가 내게 말을 거는데 엄마의 내부가 텅 비고 그 모든 말들이 저 멀리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엄마가 아직 엄마인지 이미 오래 전에 죽고 삐에로 인형이 엄마의 흉내를 내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엄마가 엄마인지를 묻는 것 또한 금기로 느껴졌다. 내가 입을 여는 순간, 삐에로는 웃고, 그러면 영원히 엄마는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식은 땀을 흘리며 엄마의 안부를 미친듯이 물으며 지내던 어느 날 밤 삐에로 인형이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아직도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다. 안녕, 난 너랑 오래 같이 지내고 싶었는데... 너는 날 너무 미워하지... 그래서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널 떠나려고 해.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기도 전에 그는 2층 내 방에 조그맣게 딸린 창문으로 휙 몸을 던져버렸다. 새벽이었고, 침대에 누운 채로 나는 마비된 듯 몇 시간을 꼼짝 없이 누워있었다. 그건 꿈이었을까? 아직도 내 꿈에는 옛날 그 집의 그 베란다 창문이 나온다. 그건 진짜일어난 일이었을까? 다음날 아침 잠에 든 줄도 모른 채 눈을 떠 조마조마한 채로 인형이 앉아있던 곳을 눈으로 훑자, 정말로 인형의 자리만 비어있었다. 정말로 그렇게 사라진건가?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사라진건가? 아니면? 사라진 척 하고 무슨 일을 꾸미려는건가?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는 몸을 겨우 일으켜 엄마를 찾았다. 엄마는 아직 엄마인가? 최대한 아무일도 모르는 어린 애처럼 순수한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그런데, 그, 인형 있잖아, 삐에로... 인형. 그거 어디 치웠어? 갑자기 없네? 인형? 아니? 아무것도 안 만졌는데, 왜? 없어졌어? 어? 아니 어디 갔나? 누가 가져갔나? 아니 누가 가져갈 리가 없는데... 뒤에 떨어진 거 아니야? 잘 찾아봤어?


나는 여기에서 대화를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야기가 더 길어지면 삐에로 인형이 화를 낼 지 모른다. 내가 정말로 아쉬워한다고 생각해서 오늘 밤에 다시 돌아올 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아 그런가? 아 떨어졌겠지 뭐, 하고 애써 다른 아무 말이나 막 했다. 미칠 듯 뛰는 심장을 감춘 채. 그런 한 편으로는 식은땀을 흘리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정말 그대로 영원히 없어져버린건가? 내가 너무 무서워해서? 이대로 순순히? 아니면 언제 다시 돌아와 현관문을 열면 엄마의 얼굴을 한 채 웃으며......


한편으론 최대한 이성적으로 가능한 일을 생각했다. 처음부터 삐에로 인형 얘기가 말이나 돼? 그냥 내가 너무 무서워서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야? 엄마가 내가 너무 무서워하는 걸 보고 몰래 갖다 버리고 모른 척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런거라면, 전날 밤 내게 삐에로가 직접 이야기한 건 뭐지? 엄마가 손 쓰기도 전에 삐에로 인형이 이미 내게 사라질 거라 예고하지 않았던가? 그 말을 듣기 전까지 삐에로 인형은 분명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엄마는 정말로 무슨 영문인지 모른다는 얼굴이다. 그럼 대체 뭐지?


가장 가능성 있는 가설은 삐에로 인형이 정말 간밤새 스스로 떠난 것이었다. 하지만 삐에로 인형은 앉은 채였는데, 서 있을 수 없었는데, 입도 없었는데, 어떻게 말을 하고 어떻게 움직여서 떠나버렸단 말인가?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혹시 그 자리에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와 앉아있는 건 아닐까 두려움에 떨며 지냈다. 아주 오랫동안 삐에로 인형이 있었던 자리를 쳐다볼 수도 없었고, 뒤를 돌아봐야할 때는 실루엣이 있는 지 눈치만 살피고는 재빨리 모른 척 고갤 돌렸다. 너무 겁이 났다.


그 시기 삐에로 인형과 관련한 일련의 일들은 내 몸 어딘가 깊이 흉을 지게 했다. 아니,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는지, 그저 기억의 왜곡인지, 상상이라면 왜 그런 생생하고 고통스러운 상상을 한 걸까. 하지만 엄마는 그 인형이 있었던 걸 기억한다.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결코 그 인형을 다른 곳으로 옮긴 적이 없다고 말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이제까지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다. 이야길 하면 어느 날 아침 돌아와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상담실에서 이야기하지 못한 또 한 가지 이유는 사실 이야길 꺼내고 나면 상담사 선생님이 웃을 것 같았다. 눈을 빨간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빛내며. 내가 이야기 하지 말랬지. 할 것 같았다.


그런 이유들로 아주 오랫동안 내 안에 묵어있던 이 문제에 대해 글을 쓰면서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

어느 부분에서 오류가 있는지, 무엇이 이 이야기의 가장 큰 모순점인지 스스로 밝혀내고 싶었지만 다만 세상에는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무서운 일이, 모순을 피한 채 언어로 정확히 설명해낼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고만 겨우 말할 수 있다. 이 이야기를 쓰는 새벽 내내 비가 내렸다. 똑똑똑똑, 나는 꼭 잠근 창문에 비가 노크 소리처럼 부딪친다고 생각했다. 똑똑똑똑, 참 이상하게 창을 두드리네. 생각했을 때 문득 빗소리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오래전 삐에로 인형이 떠난 시간과 같은 새벽 시간에, 누군가 내 베란다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