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라도 잊을 수가 없을 거다. 누구라도, 그 순간을
버스에서 내리자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화개였다.
우산을 비스듬히 걸친 채 구글맵을 켜니 숙소까지의 거리가 표시됐다. 4km. 휴대폰에 표시된 숲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하자 이내 비 쏟아지던 교토의 기억이 떠올랐다. 구글맵도 없던 시절 여행정보센터에서도 몇 겹으로 접은 종이 지도를 건네주던 시절. 일본어라고는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정도밖에 모르던 스무살, 교토에서 나는 어김없이 길을 잃은 채였다. 저녁 무렵의 천변을 무작정 걷던 중 비가 무차별적으로 쏟아져내렸다. 창문 안쪽으로 붉은 불빛이 어른 거리던 어느 허름한 라멘가게를 가까스로 찾아,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을 때 가게 주인장이 이랏샤이마세 라고 했던가 안 했던가.
나는 일본어를 못 했고 주인장은 일본어밖에 못 해서 나는 에... 라멘! 완. 라멘. 에... 위치 이즈 남바 완 라멘.. 데스까? 베스트? 베스트 라멘? 에.. 페이보릿? 인 디스 하우스..? 하며 비에 쫄딱 젖은 와중에서도 먹음직스러운 라멘을 골라보겠다며 엄지를 치켜세운 채 쩔쩔거렸고, 두건을 두른 민머리의 주인장은 매우 머쓱한 얼굴로 하? 아? 허... 하며 난처한 몸짓을 했다. 사태를 파악한 나는 자리에 앉으며 오케이, 오케이, 어.. 라멘! 디스 라멘! 원! 하고 두 번째 손가락을 세웠다. 주인장은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오케이, 라는 뜻의 얼굴 표정을 짓곤 이내 내게 따끈한 라멘을 하나 내어주었는데 그 때에 먹었던 라멘의 맛은 누구라도 잊을 수가 없을 거다. 누구라도, 그 순간을 오래오래 잊을 수 없어했을 거다. 그게 정말 내게 일어났던 건가 싶은 순간의 기억들 말이다.
먼 기억을 헤집으며 차밭을 향해 쭉 올라뻗은 길을 조금 더 걷다보니 비가 마구잡이로 쏟아지던 날의 룩셈부르크가 떠올랐다. 나라 이름이 곧 도시 이름이기도 한 곳, 성벽으로 둘러싸인 마을. 그 때 역시 구글맵은 없었고, 있었다해도 별 수 없었다. 나는 벨기에의 지하철에서 휴대폰을 갓 소매치기 당한 차였다. 아직 여행이 한 달이나 남은 상황에서 주머니가 텅 빈 것을 발견하곤 눈 앞이 아득했었다. 괜찮다고 마음을 다잡기 전에 조금쯤 울었던가 눈물 흘릴 틈도 없이 막막했던가
늘 불안을 어쩌지 못해하며 이고지고 살아왔는데 두려움이 사실이 된 순간에는 오히려 괜찮아, 도착 할 숙소의 예약 메일을 모은 프린트만 있으면 돼, 하고 들뜨려는 불안을 추스렸었다. 휴대폰이 없으니 어디에 연락도 할 수 없었고, 카메라도, 시계조차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폭우가 쏟아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음 목적지로 정해둔 룩셈부르크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늘 남다르고 싶었기 때문에 남들을 잘 알아야했다. 남들은 룩셈부르크에는 잘 가지 않았다. 내가 끌고 나가는 듯 싶지만 실은 스스로도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인생의 운수를 헤아려가며 비가 쏟아지는 룩셈부르크로 향했었다.
간혹 특정한 날씨에 특정한 빵을 굽고 커피를 내리는 카페의 문을 열면 지난 순간들의 냄새가 난다. 이건 런던에서 났던 냄새, 이건 도쿄에서 났던 냄새, 나는 카페 문을 열고 멈칫하며 착각 속에 빠진다. 나는 지난 순간들을 돌이켜 현재와 나란히 놓고 충분히 음미한 뒤에야 다시금 발걸음을 뗄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냄새를 내게 각인 시켜 준 카페에서 식당에서 주인장들은 내 앞에 음식을 내어주며 enjoy, 했었다. 나는 그 때마다 그 말을 소중하게 받아 안았다. enjoy, enjoy, 절실히, 순간 속에 있고 싶었다. 내게 다음 순간이 있으려면 그 순간들을 딛어야 했고. 살아간다는 것이 정말로 뭔지 알고 싶었다. 다시 과거가 될 순간들 속에서
우산을 받쳐든 채 배낭을 앞으로 매고 고도 높은 길을 헉헉대며 올라 낮은 대문을 젖히자 오늘 머물 숙소의 주인장이 "비 오는 데 걸어오기 힘드시지 않았어요!" 하며 비 맞은 생쥐꼴의 나를 맞아준다. 조금 힘들었지만 걸어오는 동안 좋았어요. 이 곳에 올 수 있을까 걱정이었어요. 그렇지만 결국 여기 왔어요. 나는 여전히 교토 천변가의 폭우를 맞은 채로 룩셈부르크에 쏟아진 큰 비를 맞은 채로 지나온 모든 순간들과 함께 화개의 소나기 속에서 빗물과 땀에 범벅이 된 채로 말한다.
주인장은 마당 어귀에 서서 "커피 한 잔 마실래요? 지금 커피가 절실할 것 같아요" 묻고 나는 겨우 감사인사를 건네고 툇마루에 걸터 앉는다. 잠시 뒤 주인장은 버터 바른 두툼한 식빵과 원두 커피 내리는 도구들을 가지고 곁으로 와 어서 들어요, 어서 들어요 한다. "이 시골집이 뭐라고 이렇게 고생을 하고 와요" 하며 면포 위 갈아 둔 원두에 물을 붓는 그의 말에 비로소 나는 눈을 뜬다. 뜨거운 커피를 가득 담은 컵 손잡이를 내 쪽으로 돌려주며 그가 말한다.
만끽 해요.
오래된 미래에서 막 도착한 채로 나는 비 오는 화개의 툇마루에 앉아 있다.